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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r 24. 2020

“단체전의 참맛은 이제부터다”

<구혼> 공에 혼을 담는다는 의미

   어린 시절 살던 집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습니다. 13평 아파트에서 나와 넓은 공간을 원하셨던 아버지께서 용기를 내어 결단하셨죠(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던 시대 흐름에 역행한, 우리 가족의 돌이킬 수 없는 재테크 실패 사례입니다!). 자그마한 마당에 딱 들어갈 만한 크기의 탁구대를 설치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탁구 신동(?)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대학교 안의 수많은 서클 중 탁구 동아리에 들어가 지도부장이 되고, 거기서 아내를 만나 오늘에 이른 것. 취미를 적는 곳에 자연스럽게 ‘탁구’를 표기하게 된 것 등의 출발점은 그 마당이었습니다. 지금도 매년 탁구 동아리 동기들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릴 적 마당 탁구장이 제 소중한 삶을 만들어 낸 셈입니다. 

   이쯤 되면 제가 어떤 만화를 소개할지 감이 잡히시나요?   

  

   <구혼>은 탁구 만화입니다. 흔히 탁구 만화로 <이나중 탁구부>를 많이 아시는데, 사실 그 만화는 스포츠물이 아니고 개그물이라고 함이 적합합니다. 탁구라는 스포츠를 제대로 그려낸 작품이라면 역시 <구혼>입니다.     


   온천과 탁구로 유명했던 옥마마을. 인근의 채화에 대규모의 온천타운이 들어서면서 쇠락을 거듭해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될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촌장은 마을 부활의 열쇠를 탁구 명문 고장 이미지 회복으로 생각하고, 독일에서 분데스리거를 꿈꾸던 아들 아키히코를 부릅니다. 그가 돌아와 옥마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채화 고등학교 등 전국을 대표하는 학교들에 도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만화의 주인공 스구루. 말뿐인 저와는 다른, '진짜' 탁구 신동입니다. 일본 탁구계의 전설인 할아버지와 함께 옥마마을 깊은 산 속에서 어릴 때부터 탁구를 쳐 오다 옥마고에 입학, 아키히코와 2학년 세 선배들과 함께 마을 부활을 건 탁구대회에서 기적을 이끌어 냅니다.     


   하지만 서태웅 같은(키나 얼굴은 아닙니다만) 스구루보다는, 강백호를 닮은 나머지 네 명의 이야기가 더 감동을 줍니다. 사실 아키히코는 독일에서 축구를 했을 뿐 탁구는 생초보입니다. 옥마고에 남은 3명의 탁구부원(호소카와 다케시, 사메지마 히데키, 가마다. 이름을 적어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은 채화고에서 ‘청소 3인조’로 불렸던 형편없는 실력을 지닌 이들이지요. 산속 특훈을 통해 이들은 각자의 특기를 발견하고, 시합을 거듭해가며 제대로 된 탁구선수로 성장합니다. 물론 스구루 할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지만, 탁구를 사랑하는 마음과 열정으로 자산의 가능성에 눈떠 가는 네 명의 모습은 애초 천재 스구루만큼 밝진 못해도 참 따뜻합니다.

    

   아마 작가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초점은 단체전에 맞춰져 있습니다. 4단 1복, 즉 네 번의 단식과 한 번의 복식 경기를 치러 세 게임을 이긴 쪽이 승리하는 것이지요. 보통 스구루와 맞붙는 상대가 가장 세긴 하지만, 스구루 혼자 이긴다고 옥마고가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한 시합 한 시합 모두의 마음을 공에 담아야 합니다. 중압감으로 첫 단식경기를 진 팀원에게 스구루 할아버지가 건넨 말은 그래서 가슴에 와닿습니다.


   “혼자만이 아니다. 승패는 전원이 떠맡는 거야. 단체전의 참맛은 이제부터다!”

   “동료를 믿고 최선을 다한다. 중요한 것은 그거야!”     


   그런 기억이 제게도 있습니다. 96학번인 저희 동기들은 다른 학번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개인의 실력이 뛰어난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92학번이나 97, 98학번들은 전국대회나 경인지구 단식 우승 멤버가 있을 정도로 강했지요. 학교 단체전 대표 5명을 꾸릴 때 저희 학번에선 운 좋게 한 명 정도가 포함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저희가 1997년 가을, 당시 최강이던 92 선배들과 5단 2복 학번 대항전에서 4대 3 승리를 거뒀습니다. 늦은 밤까지 동기들 모두가 공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성을 쏟아내고, 최종 승리에 감격했던 게 2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또렷합니다(그날 동아리방의 분위기는 침울했습니다. 저희가 선배는 아니었으니까요!^^).    


   탁구 왕국 옥마 온천마을은 옥마오픈 탁구대회를 개최하며 부활합니다. 그리고 이날 스구루를 비롯한 다섯 명은 단체전을 갖기 위해 다시 모입니다, 작은 공에 서로의 혼을 담기 위해. 문득 책장 위에 잠자고 있는 탁구라켓을 꺼내 휘둘러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사회 전반적 불안이 더해지는 요즘, 저희 동기들 모두가 각자 있는 곳에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길 기원합니다.


손때 묻은 이 라켓을 제대로 쥐어본 게 언제인지... 그 시절엔 열정이 넘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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