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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Apr 22. 2020

“너는 내가 아니야, 너는 너다.”

<질풍노도> 나의 길을 가는 법

   일곱 살부터 아홉 살까지 태권도장을 열심히 다닌 적이 있습니다. 약골이었던 아들이 안쓰러웠던 아버지께서 “친구들에게 맞고 다니지 말라”며 보내신 거였죠. 덕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여학우들에게 맞지 않는 것에 더해, 나름 골목대장 역할을 할 정도로 튼튼해졌습니다. 당시 관장님께선 “태권도는 격투기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심신을 단련하는 운동”이라고 강조하셨는데, 저는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심신 단련의 측면에서 흥미로운 운동이 또 있습니다. (비록 해보지 못했지만) 검도입니다. 검도 좀 했다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과거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계속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이만저만 자랑이 아닙니다. 정말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으며 수련하는 ‘무예’로 느껴집니다. 이 같은 동경 때문인지 왠지 검도를 하는 여성은 다 미인일 것이란 상상도 했습니다. 호구를 벗을 때 드러나는 긴 머리와 조각 같은 얼굴의 미녀 검객(분명 어느 만화에서 이 장면을 봤을 겁니다)! 그런 마음을 갖던 대학생 시절 검도를 배웠어야 했는데... 앞으로 이 운동을 하게 될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무렵 접했던 검도 만화 <질풍노도>. 고등학교에 입학해 검도를 처음 접한 나가토 레츠의 성장기를 담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봤던 제목은 <패자부활전>이었는데, 몇 년 전 제가 산 책 제목은 <질풍노도>(2007년 발행)네요. 일본 원제를 따라 재발행한 것 같습니다.  

   주인공 레츠는 특별할 것 없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지 못하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피해버렸던 인물이지요. 한 학년 위 선배들에게 화장실로 불려가 집단 얼차려를 받을 뻔하다가, 당당한 힘으로 막는 검도부 선배 아나미 슈운을 만납니다. 슈운의 모습에 반한 레츠는 검도부에 가입하고, 전국 여자선수권 준우승 출신 감독과 검도부 선배들의 혹독한 훈련 속에 검도를 배워갑니다. 이후 검도부 인원 부족으로 검도 시작 두 달 만에 단체전 멤버로서 대회에 출전, 새로운 상대들을 만나며 검도의 매력에 더욱 깊이 빠지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검도를 찾아 발전시키고 계속 성장해 나갑니다.  

    

   최근 이 만화책을 다시 읽으며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접했던 <패자부활전> 제목이 참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약간의 객기를 빼고는 의사 결정력도 없고 포기하기 일쑤인 데다 고백받은 여성이 오히려 기분 나빠할 정도인 찌질이 패자 레츠가 검도를 만나 변화하는 모습이 잘 나타납니다. 레츠가 동경하는 슈운! 그 역시 어렸을 적부터 한 동급생에게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패자입니다. 그를 이기기 위해 부단히 실력을 갈고닦습니다. 상대의 찌르기 기술에 죽은 아버지 기억이 있는 테츠오, 무리한 자기 욕심으로 오빠를 다치게 한 모토코도 역시 마음속 이겨내지 못한 게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벽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소신으로 검도부를 이끄는 여감독 쇼코조차 ‘이기는 게 제일’이라는 시선 앞에선 패자지요. 이런 패배감을 극복하게 만드는 게 바로 검도라는 걸 <패자부활전>이란 제목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만화를 그린 작가도, <패자부활전>이라고 이름 지었던 예전 번역가도 검도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상상해 봅니다.

     

   “무리야, 너는 내가 아니야. 너는 너다”

   누군가의 눈부신 성장, 환골탈태에는 이를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레츠의 패자부활전엔 슈운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슈운 선배처럼 되고 싶다”는 레츠의 말에 으쓱할 법도 한데, “너도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무기를 갖고 있다”며 레츠 자신만의 스타일을 몸에 익히도록 격려합니다. 그리고는 곁에서 레츠의 자발적 깨달음과 성숙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습니다(레츠가 중학생 시절 매일 자전거로 20km를 오가면서 탁월한 하체 힘을 갖춰뒀다는 게 전제가 되긴 합니다). 레츠가 자기 특성을 살린 검도 자세를 조기에 시도하고, 검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이겨내며, 새로운 목표의식을 갖는 등 변곡점 곳곳마다 멘토인 슈운의 숨결이 깃들어 있습니다. 검도 초보자가 유단자들에게 승리를 거둬가는 이야기는 슈운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물론 실화가 아닌 만화니까 이 같은 발상이 가능했겠지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회사에 충성(?)하며 달려왔는데 고만고만한 위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잘 나가는 업계 동료나 후배의 성공에 깊은 패배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눈을 들어 보면, 슈운 선배처럼 제가 가진 무기를 날카롭게 하도록 지원해주는 이들이 있습니다. 레츠 같이 어리숙한 제 딴엔 ‘저들이 내 길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때가 오면 제 뜻을 펼 수 있도록 걸림돌들을 옆으로 옮겨주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지원 속에 제가 힘을 길러 앞에 놓인 벽을 뚫고 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저도 슈운 같은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그런 선배가 되어야는데 그런 선배를 원하는 게 먼저인 저는...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ㅠ.ㅠ)


   말은 쉽지만 삶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일까요? 문득 지금이라도 검도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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