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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Oct 28. 2020

“그게 럭비다. 넌 이미 원 트라이를 따낸 거야!”

<호라이즌> One for All, All for One의 진수

  유치원을 조기 졸업한 (여섯 살까지 유치원에 다녔다가 일곱 살을 맞는 해에 이사해 1년간 소속 없이 그저 놀았던) 제가 가장 좋아했던 건 <삼총사>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보며 달타냥의 검술을 상상하고, 삼총사와 함께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곤 했지요. 그래서인지 조금 더 나이 먹어서 삼총사 영화, 뮤지컬까지 꼭 챙겨 봤던 것 같습니다. 특히 총사대가 외치는 “One for all, all for one!” 구호와 노래는 정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반면, 럭비는 고등학교 체육 시간에 실기평가라도 하지 않았으면 ‘보호장비 덜 갖추고 하는 미식축구 비슷한 경기’쯤으로 알았을 스포츠였습니다. 사실 딴 구기 스포츠와는 달리 길쭉한 공 모양과 던지기 패스는 뒤로만 해야 한다는 점 등이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과제였던 ‘공 흔들리지 않게 정확히, 멀리 차는 것’에만 신경 쓰고 지나쳤습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소설과 스포츠가 만화를 통해 만났으니, 그게 바로 <호라이즌>이란 7권짜리 만화책입니다.    


   사카키 히카루는 열심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뭐든 어중간하게 회피하는 스타일의 소년입니다. 반장과 함께 중학교 졸업앨범을 만들다가도 중간에 도망쳐 버렸지요. 그는 두 친구와 함께 졸업 기념으로 하이킹을 나섰다 폭우로 산사태를 만나고, 이식용 심장을 싣고가던 앰뷸런스의 사고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때마침 실업 럭비팀 선수들이 심장이 든 구급함을 옮기려 나서지만 길이 무너져내리고 맙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구급함을 옮길 수 없는 상황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발걸음을 뗀 히카루, 그는 구급함을 건네받은 뒤 순발력으로 낙석들을 피해 달려 목적지 병원에 이식용 심장을 전달합니다.

   이게 운명이었던 것일까요? 히카루가 입학한 고등학교 럭비부에는 구급함 이식에 나섰던 선수 중 한 명(방학 때 실업 럭비팀 훈련에 참여했던 고교생)인 이나가키 토오루가 주장으로 있습니다. 히카루는 적극적인 삶을 살기 위해 럭비부에 가입합니다. 하지만, 이 팀은 매년 1회전에 탈락하는 팀입니다. 토오루 등 두어 명을 제외하고는 형편없는 실력(물론 히카루보다는 다들 대단합니다!)을 지닌 고등학교였던 것입니다. 인근의 명문 사립학교 1학년들에게 대패할 정도였지요. 이제 연습, 또 연습입니다.

   그렇게 럭비를 배우고 익히며, 주변의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히카루의 모습이 7권 속에 채워져 있습니다.     


   지나치게 교훈과 감동을 주려는 의도가 느껴지긴 하지만, 딱 제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명문고의 스카우트를 거절하고 아동보육원에서 럭비를 가르쳐 준 스승의 모교를 택한 토오루.

   스모선수로선 작은 몸 때문에 기술을 인정받지 못했던 하나야마 치카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달리기를 하기 위해 단거리 선수의 길을 버린 카타기리 유키.


   이처럼 사연 많은 이들이 럭비부 안에서 상처투성이가 돼가며 온 힘을 다해 트라이를 노립니다. (토오루를 제외하면) 모아놓아봤자 오합지졸이었던 십여 명의 학생들이 목표를 한곳에 모으고, 남들보다 더한 노력으로 팀과 자신의 가치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챙겨줬던 친구의 호의를 도망치듯 피했던 태도를 고치려 럭비부에 들어간 히카루 역시 토오루 등 동료들 사이에서 든든한 선수의 구실을 하게 됩니다. 뜻을 품고 노력하는 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모습이 흐뭇합니다.     


   “그저 이나가키 선배 일행이 목숨 걸고 이어준 걸 절대 끊어뜨리고 싶지 않아서...”

   “우리가 너한테 맡겼고, 마지막엔 너도 목숨 걸고 병원까지 운반했어. 그게 럭비다! 넌 이미 원 트라이를 따낸 거야.”


   목숨을 걸고 생명의 끈을 이어가듯 모든 선수의 의지를 모아 볼을 골 지점까지 가져가는 게 럭비라니…. 참 매력적인 스포츠네요. 상대편이 촘촘히 막고 있는 상황에서 볼은 결코 혼자 나를 수 없습니다. 팀원 각자는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볼을 살려 연결하고 또 연결해 결국 마지막 한 명이 트라이에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One for all, all for one!”이 정말 잘 어울리는 종목임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원대한 꿈만으로 성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란 말처럼 현실은 냉정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화 중간에 명문 사립고 1학년들에게 엄청난 점수 차이로 지는 부분이 있는데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수 중 한 명이 “1년간 필사적으로 연습해왔는데도 원 트라이도 따내지 못했다”며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울분을 토합니다.


   “너흰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 회피하는 것뿐이야. 지금까지의 연습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팀원들에게 한 토오루의 이 말, 아! 맞습니다. 럭비 초보들이 모여 열심히 연습해왔지만, 아니 ‘열심히 연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원래 특기생들인 데다 추가적인 노력까지 더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모자란 것임이 분명합니다. 비단 럭비부원들에게뿐 아니라 제게도 던지는 말 같습니다. ‘이쯤 하면 충분하다’, ‘예전에 00 정도는 돼야 했었는데 세상 참 불공정하다’며 불평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실제 현실을 깨닫고 지옥훈련을 거쳐 강팀에 올라섰던 만화 속 학생들처럼 제 태도도 변해야 할 텐데 ‘어차피 해도 인정도 안 해주니 적당히 하고 말자’ 하는 듯하기도 하네요. 지옥훈련 중에도 밤새 추가훈련까지 했던 히카루처럼, 제 삶에 대한 노력을 더해야겠습니다.     


   “잘 들어라, 인생은 럭비나 마찬가지야! 어느 쪽으로 구를지 알 수 없는 볼을 달려가 따라잡고 부딪히고, 동료들과 힘을 합쳐 트라이 하는 것! 절대로 져선 안 돼.”

   노력에 노력에 노력을 더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토오루와 히카루 등이 지옥훈련까지 해서 도전했지만, 상대는 전국을 제패할 정도의 강팀이었습니다. 또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시합에서 졌다고, 인생까지 지진 않았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한 이들의 그 노력은 감동과 의미를 낳았습니다. ‘꼭 이기겠다’는 히카루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지만 수술을 망설이던 친구에게 용기를 줬고, 이들의 학교는 전국대회 우승 고교의 '가장 인상에 남은 학교'로 기억됐습니다. 내년에는 장래 유망한 많은 신입생들이 들어와 럭비부의 실력은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진 게 분명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분명히 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지 말아야 할 것은 럭비가 아니라 인생입니다. 뾰족한 인생 공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회사 생활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제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저 멀리 굴러가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공을 따라잡고 부딪히고... 결국, 트라이하겠습니다. One for all, all for one으로 함께해줄 총사대 같은 동료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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