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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ven Lim May 09. 2020

“무츠 원명류 역사 속에 패배라는 두 글자는 없어”

<수라문> 만화로 보는 1990년대 UFC 챔피언 무츠

   기억컨대 1980~90년대 최고의 인기를 끌던 대전 스포츠는 복싱이었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참 많이 봤었지요. 세계챔피언에게 도전했다 목숨을 잃은 김득구 선수를 비롯해 유명우, 장정구, 박종팔 등이 명성을 날렸습니다. 미들급을 평정했던 마빈 헤글러나, 조금 뒤에 나온 헤비급 세계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은 정말 지구에게 가장 강한 사나이 같았습니다. 복싱의 반대편 정점에는 격투 오락(?) 프로레슬링이 인기였습니다. 헐크 호건과 워리어, 릭 드 등이 WWF 무대를 달궜습니다.


   당시 이발소에 가면 <드래곤볼>, <닥터슬럼프>, <용소야> 등 손바닥만 한 만화책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최고봉’이란 소년이 무술도장을 찾아가 도장 사범 등 강자들을 꺾는 서너 권짜리 만화도 있었습니다. 머리 깎을 차례가 금방 다가와 한두 권밖에 읽지 못했지만, 어떤 격투가보다 센 최강 무인 도전 만화로 머릿속에 각인됐던 것 같습니다. 대학에 간 이후 만화방에서 ‘무츠 츠쿠모’가 주인공인 이 책을 제대로 만났으니, 바로 <수라문>입니다. (어렸을 적 접했던 것은 해적판으로, 일본 원서와 동일한 <수라의 문>이란 제목으로 유통됐었다고 합니다.)    


   무츠 츠쿠모는 천년 역사 속 최강의 고무술인 무츠 원명류의 계승자입니다. 원래 후계자였던 형 토우야를 대련 중에 죽여 당대 계승자 1명에게만 붙는 ‘무츠’ 이름을 얻게 된 그는, 형을 죽음과 연이은 어머니의 병사에 따른 트라우마로 무츠원명류를 자신의 대에서 마무리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신무관을 찾아 4귀룡을 격파한 후 전일본 이종격투기 선수권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일본의 격투기 강자들을 꺾고 우승한 츠쿠모.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복싱 헤비급 세계 최강자들을 꺾고 통합타이틀을 차지합니다. 그리곤 브라질로 옮겨가 발리투드 대회에서 또한 최고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처럼 싸우고 싸워 이기고 이기는 이야기가 서른한 권의 책 속에 담겨 있습니다.     


   무츠 츠쿠모는 직전 무츠였던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역대 무츠 중 무(武)의 신에게 가장 사랑받은 아이’입니다. 실제로 능력과 잠재력이 대단하고, 절체절명의 순간 싸움의 신 아수라의 기운으로 무츠원명류의 오의 ‘사문(四門)’을 구현해 승리를 만들지요. (주작, 현무, 백호, 청룡을 뜻하는 四門은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死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 최강의 자리를 향한 츠쿠모의 길은 외롭고 불안합니다. 자신이 무츠 원명류를 끝내겠다는 것은 최강의 무술 무츠 원명류를 증명하는 여정인 동시에, 결국 싸움에서 져서 죽음으로써 천년 역사 속 무패 전설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만신창이가 되면서 결국 살아남아 승리하는 모습은 무츠의 강력함과 처절함을 함께 느끼게 합니다.     


   무츠의 그 길은 또한 자신에게 필적할만한 상대의 죽음을 딛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형을 죽여 무츠가 된 츠쿠모. 일본 대회에서는 후와 원명류의 후와 호쿠토가, 브라질에서는 유술 최강자 레온 그라시엘로가 그의 공격을 받고 죽음의 강을 건넙니다. ‘살인기’로서의 무츠 원명류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은 물론, 만화 작가가 생각하는 강함이 어디까지 닿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남을 죽임으로써 살아남는 것, 강자생존의 섬뜩한 법칙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 일본에서는 살인을 미화한다는 논란이 있었고, 작가가 연재를 멈췄다고 합니다. 10여 년이 지나서 31권 이후의 다음 이야기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건 보지 못했습니다.)     


   직접적 연관은 없겠지만, <수라문>을 바탕으로 지금의 UFC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UFC는 다양한 이종격투기 기술을 가진 선수들이 최소한의 룰로 팔각링에서 승부를 겨루지요. 강한 자가 승리합니다. 복싱이나 유도, 무에타이 경력을 지닌 선수들이 많고, (금방 내려갔습니다만) 프로레슬링 선수인 브록 레스너가 챔피언인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시대에선 UFC 챔피언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지요. UFC의 헤비급 챔피언이 바로 무츠 츠쿠모인 셈입니다. 

   복싱이 최고로 사랑받던 1980~90년대에 이 같은 글로벌한 본격적인 이종격투기 대회를 다룬 만화라니... 참으로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화 속 세계 최강 복서 아리오스 킬레인의 최종 비밀병기가 반칙기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때 벌써 복싱 시대의 종말을 예상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이종격투기 대회는 있었을 테고, 과거보다 복싱 인기가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강한 선수들이 많긴 합니다.)


   무츠 츠쿠모의 외롭고 처절한 길에 그래도 ‘수라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마이코가 있어 다행입니다. 계속된 대전 속에 츠쿠모는 허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허기는 생존 욕구인 동시에, 채워짐을 바라는 소망입니다. 마이코는 츠쿠모가 “배고프다”며 밥을 청할 수 있는 인물이자, 지친 몸을 기대는 존재입니다. 츠크모에게 또다시 싸우고 살아갈 힘을 주는 대상이고요. 츠쿠모를 응원하는 팬의 처지에선 무츠 원명류의 대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거란 기대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또 마이코뿐만 아니라 오래전 선대 무츠와 약속에 따라 지금의 무츠인 츠쿠모를 보좌하는 인디언 청년 질코 마이이초, 그와 결전을 치렀던 대부분 상대방의 응원이 뒤따른다는 것도 츠쿠모 삶의 큰 지지기반이자 위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먼 여정을 나서는 길에 동료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격언이 있겠지요. 끝나지 않을 무츠 츠쿠모의 머나먼 싸움의 길, 죽는 날까지 죽여야 하기에 외롭고 슬플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함께 하는 마이이초가 있기에, 밥 차릴 준비를 하며 기다리는 마이코가 있기에, 박수를 보내는 경쟁자들이 있기에 그래도 그 길이 나름의 의미를 쌓아가며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사람의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원래 자연 속에서 산다는 것이 다른 생명을 먹는 것이듯이 피투성이가 된 채 계속 싸우며, 현자는 될 수 없기에 만인에게 인정받는 일도 없고, 그렇기에 고울도 없다. 틀림없이 죽는 날까지…. (1997년 작가 카와하라 마사토시의 후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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