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는 잘 돼 가요?”
“힘들어 죽겠어요”
“왜?”
“일이 많아요”
“제 심장 상태는 어때요?”
“3기, severe, 역류량도 꽤 되고 심장 사이즈도 커졌고 증상은?”
“흉통이 있고 다리 부종이 심하고 숨차요, 그런데 마스크 때문에 숨이 찬 것인지는 분간하기 어려워요”
“결혼은?”
“아직이요”
“왜?”
“사람이 없어요”
“노력해야지 맨날 연구만 하는 거 아냐?”
“그러게요 그런데 혼자가 편해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아직 젊잖아”
“허허허”
“일단 약을 소량 써보자고 아직 기능은 유지되고 있으니까 수술은 조금 더 쓰다가”
“네~"
작년에 정기검진 가서 주치의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남이 들으면 왜 환자의 결혼이 궁금한 것이며 무슨 상관이며 상태는 “severe”하다면서 수술은 왜 나중에 하는 것이며 이제 약을 다시 쓰기 시작한 거면 심장이 많이 나빠진 것 같은데 기능은 유지된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황당해할 내용이다. 3기 어쩌고 하는 것을 보니 심장에 암이라도 생긴 것이냐며 눈을 크게 뜨고 질문할 것이다. 암은 아니다. 나는 심장 판막 중기 환자이다. 암이라면 중기는 꽤 심각하다. 치료도 받아야 한다. 일상이 엉망이 된다. 그런데 심장질환은 중기여도 할 수 있는 치료가 뾰족이 없다. 증상 완화를 위한 약물 복용 정도가 최선이다. 심장 기능이 완전히 나빠진 4기가 되어야 수술해서 치료한다.
분명 환자이긴 한데 환자가 아닌 것 같다. 겉모습도 멀쩡하다. 남보다 쉽게 숨이 차고 조금 쉽게 피곤해지고 다리가 붓는 것 빼고는 사는 데 지장이 없다. 학교와 직장을 다니면서 일상생활을 잘해 나간다. 분명 환자이긴 한데 환자가 아닌 것 같은 내가 의사와 나누는 이런 대화는 내게 너무도 익숙하고 담담하다. 그리고 의사가 어떤 것을 걱정하고 있는지 어떤 배려를 하려고 이런 것을 묻는지 대화 이면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누고 온 것이다.
결혼이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나이가 아닐 때부터 아팠기 때문에 주치의 선생님들이 결혼을 걱정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인생 걱정에 전혀 포함되지 않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날은 결혼을 묻는 소리에 처음으로 경각심을 갖게 된 날이었다.
주치의 선생님들이 결혼을 걱정하는 것은 성인이 되기 이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속되었다. 소아 심장내과 주치의 선생님은 성인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는 상황 그 자체와 부정맥 약은 임신 중 복용할 수 없는 것을 매우 걱정하셨다. 성인이 되어 심장내과에 갔을 때 주치의 선생님은 결혼 여부를 고려하고 계셨다. 치료 계획과 시점에 결혼과 임신 출산은 의사가 환자와 같이 넘어야 할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임신을 하는 것, 임신 중, 출산 그 모든 과정에 심장에 큰 부담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소아과 주치의 선생님의 첫 번째 걱정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보고 설레서 심장이 두근거려 본 적이 없고 다행히 시술해서 더 이상 부정맥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 주치의 선생님의 걱정은 현실적이다. 내가 결혼할 상대가 없지만 영영 없을 것이란 보장도 없고 그렇다면 아이를 갖지 않을 것이라 확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제 간 심장내과 정기검진에서도 마치 명절에 모인 가족이나 친척들이 할 법한 정감 있으나 꽤 의학적인 대화를 나누고 왔다.
"좀 어때요?"
"약 먹고 좋아졌어요!"
"좋아지면 안 되지!"
"왜요??!!"
"증상이 있다는 것이잖아 그럼 수술해야 한다는 건데"
"플라세보 효과 아닐까요?"
"플라세보는 아닐 거예요"
"몇 년 더 써보죠.. 허허"
"얼른 결혼을 해야지,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지....."
"네.. 허허허..., 안녕히 계세요"
매번 듣는 말이고 뻔히 아는 내용이다. 해야 할 것도 잘 알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안다. 결과는 정해진 길로 들어서고 있고 결말은 어떻게 될지 뻔하다. 과정은 내 선택에 따라 변화무쌍할 것이다. 그러나 내 계획과 예상과 의지에 항상 남자는 미지수로 남아있다. 다른 질문에는 답변을 할 수 있지만 결혼을 묻는 말에는 너털웃음만 짓고 나온다. 그래도 그 질문이 가라앉는 기분을 잠시 다른 방향으로 돌려주는 일상적인 질문이라서 좋다. 6개월 후에도 결혼을 물어볼 때 나는 너털웃음을 지을지 무슨 대꾸라도 할지 미지수다. 심장 상태는 변치 않는 상수 같으니 그거 하나라도 미지수로 남겨놔야 기대하는 재미가 있으려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심장 상태를 어떻게 바라볼지 생각하다 그냥 남자로 태어났으면 조금 편했겠다 하면서 고민을 끝냈다. 생각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