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암환자는 아닙니다만

심장판막질환

by 임혜영

암 판정을 받으면 암의 병기를 말해준다. 초기, 중기, 말기 혹은 1기, 2기, 3기, 4기 라고 하기도 한다. 암 뿐만 아니라 심장 질환도 암처럼 병기를 나눈다. 나는 심장 판막 중기 환자이다. 암이라면 중기는 꽤나 심각한 상태여서 수술이나 항암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장질환은 중기여도 할 수 있는 치료가 뾰족이 없다. 증상 완화를 위한 약물 복용 정도가 최선이라서 심장 기능이 완전히 나빠진 말기(4기)가 되어야 수술을 한다.


난 분명 환자이긴 한데 환자가 아닌 것 같다. 겉모습도 멀쩡하다. 남보다 쉽게 숨이 차고 조금 쉽게 피곤해지고 다리가 붓는 것 빼고는 사는데 지장이 없다. 그래서 내 병을 설명하고 있다가 내 말을 듣는 사람의 표정에서 나를 건강 염려증 환자로 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치료법이 없어서 때를 기다리는 중인데 마치 문제가 없는데 사서 걱정을 하는 나이롱 환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부정맥보다 설명하긴 쉬웠지만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이 병을 처음 판정을 받았을 때는 1-2기였다.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다고 해서 대학도 다니고 대학원도 다녔다. 물론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괜찮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시간이 흘렀고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그리고 2년 전, 인생에서 중요한 진로 결정을 해야 했던 시기였다. 난 서둘러 정기검진 예약일을 한 달 앞당겼다. 결정에 가장 큰 변수는 심장 상태였기 때문에 검사를 받고 주치의에게 상태를 물어보았다.


"제가 이런저런거를 계획 중인데 해도 괜찮은 상태인가요? 야근도 막 하고 그래도 괜찮을 상태인가요?

"응! 마라톤도 해도 돼! 괜찮아!"

이 대답을 들을 당시에는 2기에서 3기 사이였다. 처음 판정 받았을 때보다 병은 진행되어있었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약물을 쓰지 않아도 심장이 잘 버텨주는 상태여서 난 일을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2년 후, 작년 12월 말에 정기검진을 갔을 땐 상태가 severe로 진행되어있었다. 야근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마라톤과 같은 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쉬는 동안도 쉬지 않고 달려온 탓이었나 보다. 좋은 소리는 별로 없었다. 예상한 수순대로 악화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심장 기능이 보전된 상태였다. 의사의 말, 내가 찾아본 논문 내용 그리고 내가 느끼는 증상의 정도와 검사 결과는 매번 놀랍도록 일치해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예상한 결과를 듣고 소량의 약을 처방받아서 진료실을 나왔다.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는 것도 잊었다. 오전부터 내내 한 검사도 지겹고 병원의 답답한 공기도 싫고 아무리 커도 병원은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빨리 이 공간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무작정 걸어서 뛰쳐나왔다. 도로 위 한복판에 서서 펑펑 울고 주저앉아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누가 나를 아픈 사람으로 보겠어 이렇게 멀쩡 한대!' 생각하며 병원을 나왔다.


수술 그거 별거 아닌데 왜 그리 하기 싫어서 나는 이리도 나약하게 슬퍼하는 것일까 하고 마음을 다잡아 다시 걸었다. 걷다가 근처에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연필 가게가 생각났다. 그곳에 가서 나무로 둘러싼 흑심을 보면서 맘을 조금 가라앉히고 싶었다.


지도를 보며 찾아 간 그곳은 연필들이 가지런히 있는 비밀공간 같았다. 내가 병원에서 느낀 답답함, 무서움, 불안함, 긴장감, 슬픔을 다 지울 수 있을 것 같은 아늑하고 재미있는 공간이 꾸려져 있었다. 나무로 만든 가구들, 나무로 만든 연필, 어둡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조도가 낮아진 오후 3시 넘어서의 빛, 은은한 조명, 사각사각 연필 쓰는 소리 모두 기분을 전환하기 알맞은 곳이었다. 의자가 있다면 조용히 그곳에서 한참이고 있고 싶은 공간이었다.


오후 3시 연필가게에서

몇 분 전에 들었던 곱씹어 생각할수록 슬픈 결과는 나는 모르겠다~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연필 고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연필 종류가 많으니 오로지 연필 생각만 할 수 있었다. 방금 들었던 나쁜 결과는 뇌 구석지로 던져놓고 합리적인 가격과 좋은 필감, 예쁜 디자인 그리고 몇 자루를 살지를 고민하며 머릿속에서 연필들 하나하나를 점수 주느라 바빴다.


'이건 예쁜데 필감이 별로군 이건 안 예쁜데 잘 써지군 이건 예쁜데 비싸군 이건 예쁜데 유치하군 이걸 사면 가격 대비 잘 쓸까 아니면 이걸 사야 유용할까? 이 색이랑 저 색은 차이가 뭘까 이 디자인은 처음 보는군 그래서 오늘 이 연필 가게에서 얼마나 돈을 쓸건가 연필 사는 김에 지우개도 사? 그래서 집에 아직 연필이 많은데 몇 개나 더 사려고? 지금 기분으로는 아예 이 연필 가게에 있는 모든 연필을 한 자루씩 사고 싶지? 그런데 참아 그건 아니야 내가 지금 당장 죽나!' 하며 정신 놓고 주워 담아서 한 움큼 쥔 연필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내가 이런 기분이라 해도 충동구매를 할 사람이 아니지! 내가 계획한 돈만 써야 하지! 하면서 세 자루만 사고 나왔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그런데 병원 근처 약국에서 한참 벗어난 후 처방전을 보았다. 넋이 나간 내 상태를 바라보며 괜찮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내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최대한 가볍게 전달할 수 있을지 면접 보러 가는 취준생의 마음으로 고민했다. 나는 딸이니까 속상하다고 털어놓을 수 있지만 엄마가 우는 것이 더욱 속이 상한 딸이었다. 나는 의사가 아니지만 의사처럼 내 상태를 정확하게 말해서 엄마를 안심시켜야 했고 그렇다고 의사는 아닌 가족이기 때문에 엄마를 위로할 말도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백번 시뮬레이션을 해도 결국 엄마 얼굴을 보자 나온 말은 "걱정 마~ 괜찮아~"라는 뻔한 말이었다. 그리고 멋도 없고 정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한 번은 열게 되어 있어~ 그래도 괜찮아 요즘은 의술이 좋아서"


나는 나의 표현력에 일차 한탄하고 내 상태에 이차 한탄하면서 엄마를 꼭 안아주고 내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엄마는 병원에 따라갔어야 한다고 투덜거리시고 나는 안오길 잘했다고 혼자 가서 아주 편했다고 독립적이고도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




keyword
이전 12화일상을 굳건하게 지키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