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할 수 있을까.
오전에 가벼운 일정 하나를 마쳤다. 마감하려고 카페에 앉았다. 유통 행사라 부담 없이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아차' 했다. 종종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이 정도는...'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겁게 말하면 자만이고 가볍게 하면 방심이다. 오늘 일정이 그랬다. 유통면은 시간을 들일수록 다양한 컷 확보가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컷 외에 욕심을 부리기 좋은 행사다. 다만 보도가치 자체는 별로 없어 가볍게 찍고 가는 기자들이 대부분이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갔다가 너무 가볍게 일해버렸다. 생각보다 쓸 컷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앵글이 단순해서 마감에 애먹고 말았다. 마감하면서도 '오늘 좀 그런데?' 싶어 부끄러웠다. 대충 하면 이렇게 티가 난다.
오후에도 비슷한 일정이 있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하는 일은 동류다. 일종의 스틸컷 촬영을 해야 하는데 내겐 다소 생소한 일이다. 특히나 일간지에서 잠시 막내 생활을 할 때 들었던 말처럼 상품/제품 촬영은 내게 아킬레스건과 같다. 당시 부장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야, 너 검찰, 압수수색 이런 거 잘하네!"
반면,
"너는 어떻게 유통면만 가면 이렇게 죽을 쑤고 오냐"
장면을 연출해야 하는 유통면은 아무래도 경험 부재가 그대로 사진에 드러났다. 5번 가면 1번 칭찬, 1번 무난, 나머지 3번은 혼이 날 정도로 성공률이 낮았다. 그래서 오늘 일정은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편이다. 목요일은 금요일 전날이라 꽤 좋아하는 축에 속하지만 오늘은 해결해야 할 과제를 떠안은 상태. 기쁜 와중에 목에 알약이 걸린 것 같은 기분을 간직하고 있다.
"별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라는 말을 들었지만 부담이 없을 수 없단 거지.
마감 뒤 잠시 짬을 내 설날 기차표를 예매했다. 오늘 해야겠다며 벼르던 건 아닌데 갑자기 생각났다. 근 몇 년간 집에 갈 때 고속버스를 타다 보니 지독한 도로 정체를 경험했다. 심할 땐 서울에서 울산까지 7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다. 자다가 깼는데 아직도 절반 정도 남았을 때의 기분이란 얼얼한 엉덩이 감촉만으론 설명하기 부족하다. 뒤늦게 예매하다 보니 자리가 없어 버스를 탔지만 휴게소에서 하나씩 주워 먹다 보면 얼추 ktx 값에 육박해 이번에는 아예 기차를 타기로 했다. 심야 기차라 아마 곯아떨어지겠지만 책 한 권 정도는 챙겨갈 계획이다. 물론 예매는 저렴이 무궁화호로. 지난달 지출이 너무 심해 당분간 자린고비다.
기차는 무궁화 타면서 또 무엇 하나 지르려고 틈을 보고 있다. 블랙베리 키2다. 맞다. 내가 벼르고 벼르던 그 폰인데 포기하고 노키아7플러스를 샀었다. 노키아는 예뻐서 샀는데 그게 다였다. 물론 배터리도 오래가고 카메라도 꽤 괜찮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가성비 좋은 폰으로 손꼽히기도 했다. 다만 내 용처를 고려할 때 메모를 자주 하는 사람에겐 적절하지 않다는 결과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아이폰만 쓰던 내게 안드로이드의 '딜레이' 가득한 타이핑은 좀처럼 적응이 안된다. 이전 폰인 아이폰6s만 해도 즉각적인 타이핑 반응속도를 보장했는데 이 폰은 좀 그렇다. 하지만 팔려고 해도 전파법에 걸려 팔 수 없게 된 탓에 당장 키2를 사지도 못하고 바라만 보는 중이다. 누가 간절히 이 폰을 원하는 이가 나타났는데 때마침 블랙베리를 쓰고 있어 교환을 원해주면 좋겠다는 상상을 잠들기 전에 하는 요즘이다.
월급날과 카드값+월세+공과금 등이 빠져나가는 날 사이에 2~3일 정도 텀이 있다. 이 기간이 한 달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마치 통장에 돈이 있는 듯 착각하기 딱 좋다. 이 날들을 방어하지 못하면 다음 달도 나는 거지다.
당장 생활이 고달프더라도 하고자 하는 일을 쫓지 않으면 해야만 하는 일에 매달리게 되는 것 같다. 겨울이라 체력 소모가 커서, 집에 가면 자고 일어나서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뭔가 허우적 대고 있다는 느낌은 뭘까.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와중에도 검색을 거듭한 끝에 '와이프 몰래 블랙베리 키2 샀다가 두 시간 쓰고 판매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가격도 비교적 적정 수준이다. 아저씨의 사정은 딱하지만 이건 내 통장에 엿을 먹일 아주 큰 기회 아닐까. 하지만 굳이 키2를 써야 하는 이유는 또...
슬프다.
P.S.'하루 한 장' 코너에 당장 올릴 사진이 있어도 지난날들의 사진을 미루어뒀더니 근래 사진들을 올릴 수 없게 됐다. 이래서 뭘 하나 하려거든 고민이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