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스타벅스.
피곤하다.
근래 늦게 잤더니 졸음이 쏟아진다.
밥 먹고 정신이 나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소파에 반쯤 기댔다가 감기는 눈을 부릅 떴다.
체력을 의지로 멱살잡이 했다.
신을 신고 5분 걸어 스타벅스에 왔다.
그 짧은 길이 이렇게 부산스럽다.
2월 27일, 퇴근 후.
1.
며칠 동안 글 쓴다고 까불었다. 진지하게 쓸 것도 아니면서 사족을 달았다. 일기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것에 군살이 붙었다. 신문 읽고 발제하던 때의 습관 탓이다. '기자 물 빼려면 한참 걸린다'는 말을 불현듯 깨닫는다. 쉽게 쓴다고 깊이까지 얕아선 될 글이 아니었다. 평소대로 휘갈기다 보니 글 깊이가 허리를 넘지 못한다. 진중한 글에 대한 알레르기, 마감의 압박, 크로스 체크의 부담 등이 겁났다. 그저 남들 글을 읽는 게 편하다. 언제부터였을까.
2.
오늘은 모처럼 커피다. 스타벅스 카드에 충전도 했다. 커피숍에 돈 쓰지 않기로 했던 다짐을 잠시 유예했다. 근래 나태한 저녁을 보낸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무료 음료를 위한 스타벅스 별이 1개 남은 게 두 번째 이유다. 그런 고로 스타벅스에 내려와 바지런을 떨었다. 계획과 예산, 2월과 3월분 급여로 지출 내역을 계산했다. 잔고도 예상했다. 이래저래 쪼들리는 날들이다. 기자를 그만두고 놀멍 쉬멍 했던 게 통장에 '빵꾸'를 냈다. 땜질로 상반기를 보내게 생겼다.
3.
소득 대비 지출이 적지 않다. 숨만 쉬어도 급여가 사라진다는 서울살이의 팍팍함을 체감한다. 월세와 보험, 카드값, 통신비, 인터넷, 전기세, 가스비, 교통비만으로 월급이 휘청인다. 허리를 졸라맨 생활상은 궁색해도 살만하다. 잔고를 보기 전까지는 그저 살만하다 느낀다. 생활비가 고정지출에 무게를 더한다. 기념일이나 경조사가 끼면 종아리에 알이 배긴다. 연이은 행사는 버티던 월급의 무릎을 꿇린다. 설과 화이트데이와 친구 결혼과 어버이날과 어린이날과 아빠 생신이 상반기를 달린다. 무릎으로 걷는다, 요즘.
4.
하반기는 무사할 것인가. 뇌 주름에 주판을 튕겨본다. 짜글짜글 셈하는 소리 뒤로 돈 빠질 구멍이 보인다. 아끼고 사는 청춘을 위한 소비창구다. 하반기. 엄마 생신으로 상반기를 받아 추석으로 연결한다. 혹여 하계휴가라도 갈라치면 미로쿠의 풍혈처럼 통장에 틈이 벌어진다. 이어지는 누나의 생일. 남매애와 생계 사이에 코 묻은 돈을 센다. 빼빼로데이 같은 건 구시대 유물로 넘긴다손 치더라도 다가오는 12월엔 절체절명의 크리스마스와 눈부신 새해 전야가 있다. 이쯤 되면 통장은 비다 못해 빛난다. 눈부셔.
5.
뉴스에 나오는 'n포 세대'가 누군가 했다. 기사 쓰면서도 내 얘기라곤 생각지 않았다. 기자 땐 돈 쓸 시간이 없어 쥐꼬리 같은 월급도 조금씩 쌓였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모두 회사에서 먹는 삶이란 그런 거 아니겠나. 그래서 엔포 세대를 내가 아닌 너의 이야기로 이해했다. 근데 웬걸. 빨대를 입에 물고 몇 번을 셈해도 돈이 안 모인다. 마치 어디가 끝인지 모르고 레일을 깔아가는 서부 개척시대 철도 노동자 같다. '트루먼쇼'처럼 이제야 눈치챘다. 내가 주인공이다.
6.
굳어버린 머핀을 입안에서 녹인다. 라테를 한 모금 들이킨다. 얼음을 비비던 커피의 감촉이 기다란 빨대 속으로 스킨십을 해온다. 한껏 약해진 머핀의 외피에 초콧물이 흐른다. 혀를 요리조리 움직여 맛을 음미한다. 살살 녹는다는 말이 퍽이나 어울린다. 돈이니 삶이니 그게 다 뭔가. 문득 머핀이나 하나 더 먹겠다는 생각에 엉덩이를 뗀다. 가만. 운동 계획도 짰는데. 여러모로 고려할 게 많은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니 할 수 없나.
7.
운동비를 적는다. 식단 구성에 필요한 품목도 작성한다. 흡사 리바이어던 마냥 지출 목록이 자란다. 어차피 장기간 계획. 할부로 생각하면 마음이 낫다. 대신 밥은 집에서 먹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운다. 전자시계도 살핀다. 스톱워치를 살까 했지만 손목시계가 나아 보인다. 선택과 집중을 위한 일종의 투자다. 합리화 오진ㄷ 상반기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놓으면 하반기부턴 꾸준히 저축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설득을 내면에 외친다. 그럴싸하다.
8.
카메라는 고민이다. 카메라를 사면 한두 달 내로 끝나는 할부가 다시 시작되는 셈이다. 불쑥 맥북에 묶여 할부 노예가 됐던 지난 1년이 떠오른다. 고로 사진과 할부를 두고 고민하는 순간이 오는데, 둘을 동일선상에 올리면 의외로 선택이 어렵지 않다. 물론 선택 이후 생활상이 어려워질 순 있지만 그만큼 더 벌자는 주의다. 투잡이 항상 고려 대상인 이유와 잡코리아가 즐겨찾기란에 올라있는 원인이다.
9.
알람 온, 이불 따숩, 잘 시간이다. 더 쓸 말이 있는데 벌써 3시다. 늘 보던 웹툰도 며칠간 밀리고 보려던 영화도 오늘을 넘긴다. 소파에서 시간을 뭉개다 졸린 눈을 비빈다. 이쯤 되면 왠지 퇴근 후가 느슨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타벅스에서 끊었던 일기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급하게 하루를 엮는다. 일찍 잠들지 않은 점에 의의를 두자.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