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림스 Mar 12. 2023

서른 즈음, 캐나다 시골에 삽니다.

Life in Canada

캐나다 시골에서 산다. 스쿼미시라는 작은 도시이다.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스쿼미시. 캐나다 원주민의 언어였다. 1년에 2~3번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분다. 겨울과 봄이 싸우는 3월에는 바람이 꽤나 세다. 겨울과 봄의 강한 주장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인구 2만 명이 조금 넘는 스쿼미시. 가족도 친구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낯선 도시가 주는 익명성이 좋았다. 내가 살아왔던 삶과 다르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내성적이었다면 외향적으로. 웃음이 별로 없었다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전까지 아무것도 아니었어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곳이었다.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후련함. 그 기분 좋은 해방의 느낌. 이곳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했다. 목표를 다하면 이별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 마트에서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나는 쉽게 정을 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나 자신을 챙길 사람이 나밖에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보다 조금은 다른 표정을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 결심은 6개월 만에 무너졌다. 낯선 동양인이 캐나다 시골 마트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이곳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충분했다. 나는 한국식 서비스 마인드로 고객들을 응대했다. 캐나다 문화에 맞게 인사를 하고, 감사함을 표현했다. 몇 번 온 손님들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질문도 했다. 이곳엔 어떻게 왔는지, 왜 왔는지.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나는 열심히 나에 대해 말을 했다.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떤 아저씨는 자기네 회사로 오라고 하셨다. 어느새 친절한 웃음을 가진 이웃들과 정을 나누고 있었다.


비 온 뒤 갠 밤하늘


여느 시골과 마찬가지로 심심한 이곳.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루틴이 있었다. 매일 자신의 아내를 위해 긁는 복권을 사러 오시는 할아버지. 나에게 반갑게 인사해 주시는 할머니. 하루 걸러 4만 원치 복권을 사시는 또 다른 할아버지. 하루에 한 번씩 오시는 92살의 어르신. 최근에 자신이 92살이 되었다고 나에게 아이처럼 말하셨다. 그분의 에너지는 젊은 사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만의 루틴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하루에 한 번은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누군가는 로또였고, 다른 이는 담배였다. 이외에도 독서, 산책, 아이들 등하교 등 자신들만의 무엇인가가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내 삶에 무엇인가를 추가했다. 인플레이션이 덮친 세상에서 돈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야 했다. 하나는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걷기였다. 하루에 1시간은 무작정 걷기로 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걷기로 결심했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며 걸었다. 어떤 비 오는 날은 그냥 맞은 채 걷기도 했다. 생각보다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뛰기도 했다. 호흡이 터진다.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무리를 하면 오늘은 무엇인가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벌어지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기도 했고, 과거의 선택들에 대해 복기하기도 했다. 그때 왜 그랬었는지, 더 나은 선택이나 행동은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때는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이해되는 순간들을 마주한 적도 있었다. 그런 일을 떠올릴 때면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흩어져 있는 생각들이 정리되는 기분. 사람들이 나와 같은 이유로 산책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왜 이렇게 걷는지 이해되었다. 어떤 대상들을 관찰하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걷기 코스


모든 것이 느린 이곳. 모든 것이 빠른 한국에서 살다 이곳에 오니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던가. 지금은 이 속도에 적응되었다. 버스가 한 시간에 하나 있어도 큰 불만을 가지지 않게 되었다. 불편해도 치명적이지 않으니 살 만했다. 택배 배송이 2주가 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몇 번 받다 보니 익숙해진 기분이다. 2주 만에 받는 택배는 예상 가능한 행복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찾아오는 기분이다.


캐나다의 여유는 그 밀도가 짙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는 기분. 이런 생활도 1년이 넘어가니 나만의 답을 찾은 질문들도 생겼다. 내가 누구인지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고, 앞으로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감을 잡은 기분. 처음에는 캐나다에 온 것을 후회한 적도 있지만, 돌이켜보니 내 인생에서 필요했던 시간이었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어느덧, 봄


어느덧, 봄이다. 두 번의 겨울을 지내고 두 번째 봄을 맞이하는 오늘. 가진 적은 없지만 잃어버리는 기분이 드는 세월 앞에 삶을 지탱해 주는 나만의 루틴을 찾게 해주는 것이 캐나다 시골인 것 같다. 이곳의 삶이 아니었다면 부드럽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인가 계속 놓치는 기분으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흐르는 지금, 주위에 핀 꽃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


나 역시 오랜만에 봄 소풍을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캐나다로 온 우크라이나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