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교회를 다닐 때 설교 중에 '육체의 가시'라는 말을 들었다.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교만해지지 않게끔 하셨다는 것이다. 그게 어떤 종류의 질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가시처럼 매우 불편하고 아프고 힘들었기에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의 알레르기와 더불어 살아가면서 '육체의 가시'라는 말에 대해 가끔 생각했다. 이것만 없었다면 정말 훨훨 날아다니듯 편하게 육아할 수 있었을텐데. 아무 식당이나 가서 아무 음식이나 시킬 수 있고, 음식 하나하나 전성분 읽을 필요 없고, 만일을 대비해 주사기와 약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고, 매일매일을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지 않아도 될텐데. 정말 말 그대로 가시같다. 매일매일, 하루종일 거슬리고 게다가 빠지지도 않는다. 게다가 간혹 심하게 덧나서 응급처치를 필요로 한다.
왜 이런 가시가 나와 아이의 삶에 박히게 되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교만해지지 않게 하려는 목적 하나는 확실히 달성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육아의 목표는 아이 좋은 대학 보내기도 아니고, 키 180 이상 만들기도 아니다. 그저 성인이 되어 스스로를 케어할 수 있을 때까지 큰 아나필락시스 사고 없이 '무사히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하자면 아이가 알레르기로 인해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다.
또 한 번 '육체의 가시'의 위력을 느낀 일이 있었다. 외국인이자 국제학교 선생님인 지인이 아이의 알레르기 이야기를 듣더니, 서양에서는 알레르기도 훨씬 흔하고 대처 시스템도 잘 되어있어서 국제학교 역시 그러하니 진학을 고려해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듣고 몇 달 고민한 끝에 6살 겨울 집 근처 국제학교 몇 군데에 실제로 상담을 받으러 갔다. 비용도 비싸고, 영어로만 소통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지만 아이 알레르기 케어만 잘 된다면야 무리를 해서라도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무렵 아이가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냥 한숨이 아니라 1분에 5~6회가 넘을 정도로 땅이 꺼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거 틱 아닌가 싶어 신경정신과도 찾아가고, 놀이치료도 받았다. 그런데 그 한숨이 시작된 시기가 가만히 짚어보니 국제학교 진학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하고, 상담을 다니기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그래서 아, 이게 아이한테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구나 하며 아차 싶었다. 어린이집에서도 1년마다 반이 바뀌면 몇 달을 힘들어하며 적응하는 아이인데, 일반 학교도 아닌 국제학교에서 그것도 영어만 사용하는 환경에 노출되면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병원에서는 틱 증상은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 뒤로 국제학교에 대한 고민을 접고, 아이는 한동안 오직 놀이치료와 집 앞 놀이터에서 몇 시간 뛰어놀기만 하는 행복한 일과를 보냈다. 학교는 가까운 초등학교로 보내고, 대신 내가 매일 도시락을 싸고 집에서 스탠바이하며 만약의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하며 지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자 한숨쉬는 증상이 서서히 사라져 몇 달 만에 아예 없어졌다. 새롭게 돋아났던 '육체의 가시'가 사라진 셈이랄까.
아이의 한숨 사건을 계기로 나는 국제학교 진학에 대해 고민하던 내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았다. 알레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고생하고 있으니 보상심리로 국제학교 진학이라는 남들과 다른 루트를 통해 내 아이를, 그리고 나를 더 빛나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도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교만한 엄마를 정신 차리게 하려고 그런 가시가 찾아왔던 것은 아닐까.
지금 아이의 알레르기도 어쩌면 나의 또 다른 교만함을 견제하기 위해 심겨진 가시일 수 있겠다. 딸 셋 중 첫째로 태어나 엄마, 아빠는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까지 온 사랑을 독차지하고 컸던 나는 자존감은 높지만 그만큼 쉽게 자만에 빠지는 사람이다. 마치 나 혼자 잘나서 큰 것처럼 구는 철 없는 딸이다. 내가 반성하고 참회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 알레르기라는 가시도 스르르 빠지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