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친구와 보라카이 여행을 떠났었다. 처음 가 보는 패키지 여행이었는데, 버스 안에서 까만 피부의 가이드가 이미 수천번은 더 했을 멘트를 던졌다. "대나무가 어떻게 길게 자라는지 아세요? 바로 중간 중간에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디가 없다면 부러지고 말겠죠. 여행은 우리 인생에 마디를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로 나는 여행이 더 좋아졌다.
시간이 늘 시계초침처럼 일정하게 흐르는 것 같지만 어떤 때는 참 늦게 흐르고 어떤 때는 빨리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어떤 순간은 유독 선명하게 새겨진다.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들을 떠올려 보면 마치 마디 같이, 매듭 같이 여겨지는 순간들이 있다. 첫 학교 입학이나 취업, 결혼, 출산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가 있었던 순간들도 마디로 남는다.
아이의 첫 아나필락시스가 내게는 아주 단단한 마디처럼 새겨져 있다. 그리고 최근에 새겨진 내 감정의 마디는 아이 알러지 수치 검사를 듣던 순간이었다. 어차피 변화가 없을 것 같아 몇 년 미루다가 대학병원을 전원하면서 새롭게 피검사를 받았는데, 결과 듣는 날은 보호자만 와도 된다고 해서 혼자 병원을 찾았다.
수치가 오히려 더 올랐고, 이런 양상이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없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데 내 몸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아무리 잠그려 애를 써도 멈추질 않았다. 그러자 교수님은 다른 엄마들 이야기 좀 들어보라며 나를 유발검사실로 나를 데려가셨다.
거기에는 경구유발테스트 중인 아이들과 엄마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처럼 우유, 계란 알러지가 있는 아이의 어머니가 계셨는데,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고이시고는 "아 정말 안 울려고 했는데..."라며 천장을 바라보셨다.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동일한 파동이 마음 속에서 느껴졌다. 아이 검사하는 와중에도 이야기를 나눠주시고, 검사실에 계시던 다른 의사선생님도 위로를 해주셔서 그 날 마치 마음 속에 고여 있던 눈물을 다 빼내듯이 울고 나왔다.
그 날 이후로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아니지만, 뒤돌아보니 그 날 마음 속에 단단한 마디 하나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 날의 기억과 감정들이 분명하게 기억나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내 마음이 자랐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자의든 타의든, 삶의 마디를 만드는 일은 '꺾이지 않는' 마음과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하다. 누군가의 삶에 따뜻한 위로든, 금전적 도움이든 흔들리는 마음을 꽉 붙들어 매 줄 마디 하나를 만들어주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그래서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훈계처럼 들리거나, 그저 힘듦을 토로하는 푸념이 아닌 위로가 되고 마디가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