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수정 Sep 18. 2023

불안과 트라우마가 나를 삼킬 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에 전화벨이 울리면 덜컹 심장이 떨어진다. 아니어야 할텐데... 수화기 너머 "어머님 죄송해요~"로 시작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재빨리 젝스트(에피네프린 자가주사)와 항히스타민제부터 손에 쥐고 일단 나가면서 통화를 계속한다. "승현이가 친구 우유를 한 모금 마셨는데...오셔서 병원에 데려가셔야 할 것 같아요"


어린이집까지는 언덕길이라 숨이 차서 전속력으로 뛸 수가 없다. 평소에 운동 더 해두지 않은 내 자신을 원망하며, 아이를 안고 걸을 때는 15분 걸리던 길을 6분만에 뛰어간다. 아이를 안고 택시 어플을 켜지만 골목 안이라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대로변까지 퉁퉁 입술이 부은 아이를 들고 뛰며 "괜찮아? 숨 쉴 수 있어?"를 반복해 물어본다. 겨우 잡힌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향하는데, 시내 중심가라 차가 어지간히 막힌다. 지금 주사를 찔러야 할까, 조금 더 버티며 응급실에 가서 의사선생님께서 놔주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이 숨소리를 들으며 목이 쉬진 않았는지 정신은 차리고 있는지 계속 체크한다. 마음이 급해 일단 신호가 걸렸을 때 빨리 내려달라고 기사님을 재촉한다. 다시 뛰기 시작한다. 겨우 응급실에 도착해 물어보는 선생님들마다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아이가 우유, 계란 알레르기가 있고 아나필락시스도 겪은 적 있는데 오늘 친구 우유를 한모금 마셨대요."




내 트라우마를 촉발하는 요인은 기침소리다. 아이가 작은 기침이라도 하면 또 심장이 덜컹해 고개를 홱 돌려 쳐다본다. 아이는 항상 아나필락시스가 올 때마다 기침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레가 걸렸나? 싶은 기침이다가 점점 간격이 짧아지며 심해지고 두드러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빨리 약을 먹이면 기침이 잦아들고 증상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지만, 장염이나 편도염 등에 걸려 염증 수치가 높을 때는 약을 먹여도 점점 더 심해지기 때문에 빨리 병원에 가야한다. 


이런 일을 지금껏 몇 차례나 겪었을까. 운 좋을 때는 약 1년간 아나필락시스 없이 가벼운 알레르기 증상만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다. 운이 나쁠 때는 한 두달 간격으로 응급실을 찾은 적도 있다. 참 신기하게도 내가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악순환의 늪에 빠진 것처럼 악재가 덮치고 또 덮칠 때가 있다. 이럴 땐 주의한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곳에 구멍이 생겨 결국 응급실에 가게 된다. 마치 강력한 펀치 한 방을 맞고 넘어졌는데 미처 정신차리고 일어나기도 전에 한 대 더 맞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아무리 일어서려 해도 발이 늪에 빠져 움직일수록 더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다.




여러 차례 겪어도 변하지 않는건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그 느낌이다. 변한 것은 조금은 체계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는 것. 기침이 시작되면 두드러기가 올라오지 않았는지, 목이 쉬진 않았는지 증상의 정도부터 체크하고 심하다고 판단하면 곧바로 젝스트를 꺼내 허벅지에 주사를 놓는다. 그 뒤 시계를 보고 아이가 음식 먹은 시간, 증상이 나타난 시간, 약 먹은 시간과 양을 체크한다. 다음으로 아이가 직전에 먹은 음식의 전성분을 확인해 응급실에서 곧바로 대답할 수 있게끔 준비한다.


한 번 아나필락시스로 응급실에 실려가면 5~6시간은 나올 수 없다. 주사를 맞고 증상이 가라앉은 듯 보였다가 더 센 후폭풍이 올 때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로 보호자는 1명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우선 휴대폰 충전기부터 챙긴다. 남편과 연락도 해야 하고, 무료해하는 아이에게 영상이라도 보여줘야 한다. 아이가 증상이 나아지면서 배고파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평소 먹어도 아무 문제 없던 두유나 간식거리를 챙겨가기도 한다. 


들어갈 때는 그야말로 까딱하면 위험한 생사의 문턱 앞에 있는 상태인데, 에피네프린과 스테로이드를 맞으면 수 시간에 걸쳐 아이가 점점 살아난다. 아나필락시스는 빠르게 대응만 하면 금방 회복이 되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나올 때는 환하게 웃으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께 배꼽인사를 하고 제 발로 걸어 나온다. 살았다, 우리 아이가 살았다, 정말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며 집으로 향한다.



이것이 내가 빠져 있던 늪이다. 아이가 알레르기가 없어져야 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아무 걱정 없이 아무 음식이나 먹여도 되는 날이 와야 내 불안도, 트라우마도 사라질거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상태는 그대로고, 여전히 위험도 그대로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늪에 빠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늪은 상황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었다. 상상도 못해봤던 응급 상황들, 내 힘으로 낫게해줄 수 없고 확실한 치료법도 없는 상황을 떠올리면 한없이 무기력하고 초조했다. 내 머릿 속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어떤 발버둥을 쳤고, 어떤 것들이 나를 구원했을까.

이전 02화 응시할수록 점점 더 커지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