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심겨진 이름
‘수풀 림’에 ‘빛날 빈’, 내 이름에는 ‘나무 목’ 자가 두 개씩, 총 네 개가 들어있다. 세 글자뿐인 이름에 네 그루의 나무가 심겨 있는 탓인지, 나는 오래도록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으레 나무 같은 사람은 굳건한 면이 있어서, 천둥 치는 밤에도 그 허리를 굽히기는커녕, 당당히 비바람을 맞이하는 태도를 가졌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가령 우직한 성품을 지녔거나, 매사에 당당한 낯빛을 가진 사람에게 ‘나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마련이다.
나는 우직함보다는 유연한 게, 단단함보다는 부드러운 게 좋아서 나무의 그런 면과는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외형적으로도 그런 강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다.
나무 목을 구태여 붙여두신 것은 아마 숲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부모님의 배려일까, 외롭게 서있는 나무보다, 뿌리가 뒤엉켜 종국에 함께 숨 쉬는 사람이 되라는, 그런 마음이셨겠다.
운이 좋게도, 베란다 문을 열면 싱그러운 숲이 보인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가지들 사이로 새들이 칭얼댄다. 봄바람이 부는 요즘, 나뭇잎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저들도 사실 살아 숨 쉬는 건 아닐지, 재잘재잘 대화하는 건 아닐지 허튼 고민을 해본다.
스승의 주일이라고 보자기에 정성스럽게 싸인 떡을 건네는 청년들을 보았다. 뿌듯함과 사랑스러움,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고민과 미안함등이 뒤섞인 감정을 한차례 맛본다.
과연 ‘스승’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존재했는지 고민하면서, 이내 곁을 내어준 이를 떠올린다. 내 유약한 뿌리를 단단히 붙잡아주는 당신이 있어서, 구태여 내 곁에서 단단하게 존재해 주는 이들이 있어서, 오늘 나도 여기에서 그들의 뿌리를 붙잡을 수 있다고, 고맙다고,
‘말씀 언’에 ‘이룰 성’ 자를 붙이면 ‘정성 성’이라는 한자가 완성된다. 말씀대로 이루는 일에는 어떤 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아빠가 너 이름 지을 때,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빛나라는 의미를 담았어.”라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 말씀이 ‘서로 사랑하라’였을까,
그래, 나는 오래도록 나무 같은 사람이 되겠다. 생애 끝에 줄기가 꺾였을 때에, 남겨진 밑동에 뺵빽한 나이테가 쌓인 그런 나무. 그렇게 다짐하는 것은, 아마 세 글자뿐인 내 이름에, 나무가 네 그루 심겨 있기 때문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