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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의 Expat Oct 24. 2021

익숙지 않은 상황으로 나를 던지자!

여행 육하원칙, Where?

익숙한 환경에 붙잡혀 있는 한 우리는 절대 달라질 수 없다. 바로 의지를 비웃는 관성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작과 정체성을 꿈꾼다면 반드시 당신은 지금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 새로운 환경과 역할 속에서 당신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최고의 변화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벤자민 하요)


누구나, 그 순간 인생에서 가장 적합한 장소에 있다. 

그러니 어디로 떠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익숙지 않은 상황으로 나를 던지자!


익숙치 않은 길에서 만난 삶의 단어들!


내게도 익숙지 않았던 곳으로 떠났던 긴 여행들이 있었다. 

떠날 때는 미처 몰랐지만 돌아올 때 익숙해진 인생의 단어들도 있었다. 

두려움, 자신감, 봉사, 직업, 다름, 행복, 나이, 사랑, 결혼, 죽음... 

아직도 찾아 헤매는 단어가 으니 떠나야 할 이유도 많이 남아 있다.


1. 첫 유럽. '두려움' 알을 깨고 밖으로!            


1990년, 유럽 배낭여행. 한 달 반 동안 18여 개국을 미친 듯이 기차를 타는 여행이 끝나자, 혼자 하는 유럽여행 별 거 아니었다. 모르 두렵고, 알고 나니 두렵지 않았다. 두려움을 극복한 여행의 기억은 여대생의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일단 바람이 들었으니, 다시 떠나야 했다.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며 다음 여행경비를 모았다. 다음 여행 계획을 세웠다. 

첫 여행의 단어는 두려움, 모든 것이 새로웠다. 두려움은 새로움의 비슷한 말이다. 인생의 길이 바뀌었다!


2. 철의 장막 너머의 구소련. '자신감' 버티고 성장하라! 


1991년, 구소련. 유럽 내게 구소련은 사람이 다녀오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여행을 준비하다, 2-3개월 여행경비로 일 년간 언어연수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다. 출발 일주일 전 쿠데타가 터졌다. 변혁의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갔다. 91년의 러시아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물건이 없어  모이면 줄을 선다고 농담했던, 그 시절의 모스크바를 나는 사랑했다. 사람들은 투박지만 정이 있었고, 밤거리 불빛별로 없었지만 부랑자도 거의 없었다. 6개월간겨울은 머리가 뚫린 듯 추웠지만 20대의 나에겐 빙판 위 종종거림도 낭만이었다. 볼쇼이 극장, 미술관, 박물관을 마음껏 다녔다. 짧은 가을 모스크바 대학의 낙엽도 아름다웠다. 탈린, 리가, 키예프, 소치, 얄타, 레닌그라드, 중앙아시아, 하바롭스크, 사할린... 부지런히 여행했다. 한국 왕복 비행기표가 50불, 레닌그라드가 2불, 하바롭스크가 10불이던 시절이었다. 

여행의 단어는 자신감,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서 성장하기를 배웠다. 자신감을 장착하자, 나는 세상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3.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자원봉사, 삶의 방향을 바꿔라!      


1997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에서 돌아와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러시아어를 하는 사람은 예상대로 희소했지만 러시아와 무역도 많지 않았다. 통역하던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무역센터 건물에 있었다. 20대의 난 그 건물이 좋았다. 전망 좋은 사무실 전경을 바라보며 멋진 식당을 돌아다녔다. 2년 후, 월급이 밀리고, 식사하면서 얘기해야 하는 통역도 지루해졌다. 친구가 신문광고 하나를 내밀었다. 한국국제협력단 해외청년봉사단, 한국어 교육. 나름 38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합격하여 7기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2년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농장에서 한국어 교육을 다. 자원봉사자로서 학생들과 함께 한 2년은 멋진 배움이고, 성장이고, 마음의 휴식이었다. 활동 후, 동유럽, 그리스,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터키를 여행할 기회도 있었다. 

여행의 단어는 자원봉사자. 인생에 과분한 명칭 중 최고봉이다. 내가 가진 걸 조금 주고, 더 많은 걸 얻어오기. 삶의 방향을 재설정했다!


4. NGO. 직장, 일하며 배우며!


2001년, NGO.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와 늦은 나이에 국제대학원에 입학했다. 영어로 수업했다. 러시아어 특채인 내겐 힘든 2년이 지났다. 난 그리 이타적이지도, 돈만 따라가지도 못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공익적 활동을 하고 싶었다. 교수님이 추천 환경단체 국제팀에서 일다. 국제회의를 조직하고, 2002 남아공 지속가능 개발회의에 참석하고, 태국, 말레이시아로 환경침해 해외사례 다큐 여행도 떠났다. 밤낮으로 토론하며 다양한 일을 했다. 돈은 적게 벌었지만 사람이 귀해 마음이 편했고, 일이 많아 여러 가지를 배웠고, 좋은 친구들이 남았다. 

여행의 단어는 직업이었다. 돌아보면 인생 최고의 직장! 직장을 돈만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다.


5. 미국. 다름, 다양성을 존중하라!    


2004년, 미국. 20대 초 구소련으로 떠나며, 러시아어라는 무기를 가지면 영어쯤은 안 해도 되리라는 무모한 희망을 품었다. 국제관계일에서 영어는 장벽이었다. 대학원 시절 3주간 대륙횡단 캠핑여행을 했던 미국으로 떠났다. 30여 개국의 나이도 다양한 학생들과 문화 차이를 경험하며 다른 관점 생각을 배웠다. 친구들과 틈틈이 미국과 캐나다도 여행했다. 

여행의 단어는 다름. 각자의 문화, 경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조각된 생각의 표현이었다. 외국생활에서 다름을 존중하니 좋은 친구들도 생겼다!


6. 남미. 행복, 누구나 가진 것!   


2006년, 남미. 친구들과 사회포럼이 열린 베네수엘라, 까라가스로 향했다. 열기와 혼돈의 포럼을 마치고, 아마존 강을 건너, 남미를 5개월간 여행했다. 지금도 인상적인 여행지를 물으면 광활한 자연과 용광로처럼 문화가 뒤섞인 경이의 대륙, 남미를 말한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들! 내 눈에는 참 이상하게, 이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 행복했다. 어디서나 춤을 추고, 항상 웃었다. 

여행의 단어는 행복이다. 행복이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을 뿐, 척도가 아니었다. 나도 원한다면 행복할 수 있어야 했다!


7. 한국국제협력단. 대한민국, 난 한국이 좋다!


2006년 KOICA. 5개월 후 미국으로 돌아왔다. 코이카 전문가 모집, 1차 합격과 인터뷰 요청이 오자, 다음날 비행기로 귀국했다. 개발협력 정부기관, 코이카에서 2년을 근무했다. 관련정책도 작성하고 10여개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코스타리카, 아제르바이잔, 중국, 튀니지로 몇 번의 출장 갔다. 정부차원에서 개도국 정부와 진행하는 개발협력 프로젝트를 배 멋진 기회였다. 수혜국에서 공여국이 된 한국의 경험은 개도국에게 좋은 모델이었다. 물론 아직 가야할 길도 멀지만 민주화, 한강의 기적, 금 모으기, 촛불 혁명을 이룬 한국은 꽤 괜찮은 나라였다. 

여행의 단어는 대한민국이다. 외국에서는 누구든 애국자가 된다. 요새는 K-Culture로 여기저기서 한국 팬이 출몰하는 통에 외국생활이 조금 더 즐겁다.


8. 프로젝트 어브로드, 평생 돈에 속다!


2008년 프로젝트 어브로드. 코이카 근무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프로젝트 어브로드라는 영국 발런티어, 인턴쉽 기관에서 한국사무소 지사장을 모집했다.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여러 나라에 이어 한국에도 개설한 것이다. 현장점검으로 네팔, 피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어브로드는 여행경비와 체재비를 봉사자가 부담하고 자원봉사여행을 떠나는 개념이었다. 개도국이니 비행편도 비쌌고 여건도 열악했다. 나름 비싼 자원봉사의 가치를 잘 팔 수 없었다. 사실 이제 찬찬히 돌아보니 놀랍게도! 난 돈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 있는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가이드로 기념품 상점에서 커미션을 받았을 때 민망함, 무역회사 시절 돈에 대한 관점, NGO에서 받은 작은 돈의 만족감...실패는 당연했다.

여행의 단어는 돈이었다. 정말 놀랐다! 평생을 돈에 속았다. '나는 돈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평생 살았는데! 돈을 버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니! 대부분의 돈을 여행에 쓰는 내게 돈의 효용은 여행할 수 있을 만큼이었다.


9. 아프리카 가나. 결혼, 파티는 계속된다. 함께!


2014년, 아프리카 가나. 20대 해외 청년 자원봉사자, 30대 환경정책 전문가, 40대 개발협력 전문가로 나와 인연이 깊은 코이카 가나 사무소로 떠났다. 출장이나 여행은 했지만 아프리카 장기 체재는 처음이었다. 말라리아는 감기였고 그 해 에볼라가 서아프리카를 휩쓸었다. 본부에서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관리하는 갑이었다면, 사무소는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을의 세계였다. 그리고 가나에서 인연을 만나 늦게 결혼했다. 

여행의 단어는 결혼, 결혼이란 혼자도 잘 놀 수 있지만, 매번 친구를 찾기도 조금 힘들고 귀찮을 쯤, 함께 놀만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삶은 함께의 영역으로 전면적 전환을 맞이했다. 


10. 스리랑카. 죽음, 모르겠다!


2016년, 스리랑카. 아이가 태어나고 남편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 년을 근무했다. 한해 뒤 스리랑카로 떠났다. 40대 후반 늦깎이 엄마로 4년을 보냈다. 이방인으로 사는 것도 배워야 했다. 경단녀가 되었으니, 박사논문을 끝내자 생각했다. 그리곤 큰 파도가 몰려왔다. 부활절 폭탄테러 친구의 죽음, 내게 새로운 가족이 생기자, 안심하듯 길을 떠난 엄마의 부재. 가까운 죽음을 직접 마주했다. 

여행의 단어, 죽음! 누구나 떠나야 할 마지막 여행. 놓아야 한다는 가장 강렬한 배움길. 아직 잘 모르겠다!

2021년. 익숙지 않은 열한 번째 여행길. 몰도바.

로나 시절, 여행의 단어는 여행과 일상이다.


여행은 새로운  발견하는 길이고, 

일상은 익숙해져 두근거림이 사라진 길이다.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두근거림이 있다면 어디서나 여행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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