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이 나가자마자 여학생들이 준기 곁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돌 연습생인 준기는 많은 아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인기 그룹 ‘아스테르’가 있는 소속사의 연습생이기에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J.K. 빽, 나 이것 좀 오빠들 전해 줄 수 있어?”
“J.K. 빽, 우리 오빠들 싸인 한 장 어떻게
안될까.”
“근데 J.K. 빽, 너 요즘 얼굴에 뭐 했니?
얼굴이 좀 달라 보이는데.”
“너 데뷔 언제 해? 너 뜨면 우리 모른 척하면
안돼.”
“그럼, 그럼. 나의 1호 팬들을 내가 모른 척 할 리가~ 그리고 아스테르가 요즘 스케줄이 너무 많다 보니 나
도 회사에서 자주 볼 수가 없다. 기다려봐. 보게 되면 내가 다 전해줄게. “
준기는 우리 검인고등학교에서 자칭 ‘J.K. 빽’ 으로 불린다. 준기란 이름이 아이돌 이름으로는 영 촌스럽다면서 데뷔하기도 전에 일찌감치 예명을 지어놓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늘 자신을 J.K. 빽으로 소개했다.
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준기는 어떤 기분일까. 서우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그 기분이 참 궁금했다.
“아, 존나 시끄럽네.”
최강호의 한 마디에 여학생들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흩어졌다. 강호는 우리 학교 2학년 일진 무리들 중에서도 1짱이다.
“J.K. 빽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야 빽준기!! 늦게 왔으면 좀 조용히 해야지. 여기가 니네
연습실이냐. “
“아, 쏘리 쏘리. 아침부터 나의 팬들이 너무 시끄럽게 했네.”
준기가 특유의 능글능글한 웃음으로 이 분위기를 넘기려 애쓰는 게 느껴졌다.
“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데뷔도 힘들어졌다며?아직도 연습생 안 잘렸냐?
연습생 주제에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설쳐대 설쳐대긴. “
강호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준기를 보면서 말했다. 서우는 순간 준기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봤다. 조마조마했다. 늘 그랬듯이 준기가 꾹 참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주길 속으로 바라고 또 바랐다.
“아이 또 왜 그러셔~ 나 같은 연습생 자르면 우리 회사가 손해지. 안 그래? 헤헤. “
떨리는 눈썹을 진정시켰는지 준기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내 말이 웃기냐? 이 새끼 왜 실실 쪼개지?”
강호가 정색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준기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태진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교실을 흔들었다.
“아, 존나 시끄럽네.”
순간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태진에게로 쏠렸다. 서우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터질 것만 같았다.
교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던 소율도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 뭐지 이 새끼는.”
강호가 방향을 틀어 태진에게로 다가갔다. 태진은 전혀 기죽지 않고 일어서서 강호에게 맞섰다.
강호보다도 한 뼘은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며 한눈에 봐도 태진의 피지컬이 우수해 보였다.
그때 1교시 시작종이 울리고 곧바로 과학 선생님이 들어왔다.
“자, 다들 제 자리 앉아.”
강호는 너 나중에 보자는 눈빛을 마구 발사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준기는 4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책가방을 챙겨 들고나갔다. 오늘은 소속사 월말평가가 있는 날이라 조퇴를 하고 서둘러 연습실로 가야 했다. 이번 월말평가는 데뷔조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기로에 놓인 중요한 평가였기에
준기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교실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그냥 얼렁뚱땅 강호의 비유를 맞춰주면서 잘 넘어갈 수 있었는데 태진이 녀석은 왜 끼어 든 걸까.
자신을 도와주려 한 걸까. 아니면 정말 강호와 맞짱을 뜰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준기에게는 여러 가지로 심난한 하루였다.
‘오늘은 월말평가에만 집중하자.’
서우는 길게 늘어선 급식실 줄 중간쯤에 끼어있었다.
오늘도 급식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늦게 왔더니 우리 반 아이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밥을 먹고 있었다. 서우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 바로 급식시간이었다. 1학년 때는 늘 혼자 먹었다. 그게 싫어서 1학년 때는 급식을 먹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발견한 24시 무인라면가게는 혼자 먹어도 신경 쓰이지 않고 마음이 편안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교실로 돌아갈까.’
고민을 하면서 급식실을 둘러보니 우리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테이블과 떨어진 곳에서 태진이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서우는 오늘만큼은 용기를 내보기로 마음먹었다. 태진에게는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식판을 받아 들고 태진 앞으로 다가갔다.
“저, 저기... 같이 먹어도 될까?”
급식실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안 그래도 기어들어가는 서우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그래. 같이 먹자.”
태진이 무심하게 툭 던진 말이지만 서우에게는 손을 내밀어 잡아 준 것처럼 고마웠고 용기를 낸 자신이 너무 대견스러웠다.
“저기 그런데... 괘, 괜찮아? 강호가 이따가남으라고 했다며...”
“아, 그거? 나 알바 가야 해서 바빠. 그놈이 남으란다고 남을 필요도 없고. “
서우는 아주 잠깐 걱정이 되었지만 어쩌면 태진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했다.
“나도 합류해도 되지?”
서우와 태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소율이 식판을 내려놓고 있었다. 오히려 당황한 건 서우였다.
태진은 못 본 척 아무렇지 않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같은 반 친구가 말을 거는데 대놓고 무시하는 건 예의가 좀 아니지 않나? “
풉, 순간 서우 입안에 있던 밥알들이 튀어나올 뻔했다. 무인라면가게에서의 복수인가.
태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소율과 서우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러다 셋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강호한테 왜 맞선 거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냥... 나도 남 일에 끼어드는 거 좋아하지 않는데 오늘은 좀 참아지지가 않았어. “
대화가 다시 중단되었고 셋은 묵묵히 입에 밥을 떠 넣었다.
“아, 오늘따라 메뉴가 왜 이래? 뭐 집어 먹을 게 없네. 이따가 라면이나 먹어줘야겠다.
저녁에 무인라면가게 갈 건데 갈 사람? “
“나, 나도 갈게.”
서우의 빠른 대답에 놀란 건 태진이었다. 그리고 서우와 소율이 태진을 쳐다보며 눈으로 대답을 요구했다.
“뭐, 그러던지...”
기분 좋아진 서우가 한 마디 더 거들었다.
“나 거기서 늘 혼자 먹었는데... 혼자 먹는 게 맘 편했는데 이상하게 너희들이랑 지난번에 먹었을 때도 마음이
편했어. 준기도 오늘 올까? 아까 월말평가라고 인생이 걸린 문제라면서 심각하게 가던데.
잘 됐으면 좋겠다. 준기... “
오늘 하루 동안 할 말을 다 한 듯한 서우가 진심으로 준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소율과 태진은 그저 말없이 밥을 먹을 뿐이었다.
밤 9시.
24시 무인라면가게 간판의 불빛이 유난히 빛이 나고 있었다. 소율과 태진이 말없이 라면 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지난번에 말이야...”
먼저 침묵을 깬 건 소율이었다.
“그 식당에서 알바 하는 거야?”
“응”
“엄마랑 하는 말 다 들었겠네.”
“미안. 일부러 들으려던 건 아니었어.”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지. 그냥 쪽팔려서 그런 거지.”
“뭐 쪽팔릴 것까지야. 니 처지나 내 처지나.”
라면기계에서 뜨거운 물이 김을 내뿜으며 나오고 있었고 둘 사이 침묵은 다시 이어졌다.
어색한 시간이 길어질까 봐 걱정할 무렵 고맙게도 서우가 들어와 주었다.
“소율이 넌 매운 라면 진짜 잘 먹는 것 같아. 나는 눈물, 콧물 다 빼면서 먹는데 말이야. “
서우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매운 라면을 후루룩 먹는 소율이 신기했다.
“난 매운 라면 하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
그러자 무심한 말투로 태진이 한마디 했다.
“그러다가 위장 다 버린다. 적당히 먹어라.”
태진은 아무리 봐도 츤데레 같단 말이지. 서우는 그런 태진이 싫지 않았다.
“쟤는 무슨 우리 할머니 같은 소릴 하냐.”
어릴 때부터 매운 라면을 잘 먹었던 소율에게 외할머니는 자주 저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늘 소율이 좋아하는 라면을 맛있게 끓여주시던 할머니. 순간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와서 가슴 한 구석이 찌릿했다. 딸랑딸랑~
라면가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준기가 등장했다.
“헤이~~ 친구들.나만 빼고 이러기 있기 없기~~~”
“내, 내가 준기한테 카톡 했어. 혹시나 올 수 있으면 왔으면 좋겠다고.”
서우가 태진과 소율을 보며 쑥스럽게 말했다.
“월말평가는 어땠어?”
“내가 누구냐. J.K. 빽 아니겠냐. 최선을 다했으니까 뭐 좋은 결과가 있겠지. 오늘 하루 종일 굶다시피 했더니
배고파 쓰러지시겠다. “
준기의 등장으로 갑자기 시끌벅적해진 무인라면 가게였지만친구들은 이 분위기가 내심 싫지 않았다.
“혼자 가겠다고요. 이젠 혼자 다닐 수 있어요.”
서우가 병원건물 앞에서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선생님 말씀을 좀 들어봐야...”
“괜찮다고요. 엄마, 저 이제 고2예요. 제발 좀... 병원만큼은 혼자 다니고 싶어요. “
“그래, 알았다. 알았어. 엄마 갈게. 진료 잘 받고 집으로 곧장 올 거지? “
“알았어요. 얼른 가세요.”
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던 서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엄마 앞에서는 왜 자꾸 짜증만 나는지 모르겠
다. 엄마 모습이 보이지 않자 비로소 마음이 놓인 서우가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성함이요.”
“최... 서.. 우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한 서우였다. 그때 진료실에서 나오는 익숙한 얼굴, 준기였다.
“어? 배, 백.. 준기?”
놀란 서우가 준기의 이름을 불렀다. 서우보다 더 당황하고 놀란 표정을 한 준기의 모습은 난생처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