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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Sep 07. 2020

변화하는 쿠바, 그 역사적인 현장에 내가 있었다-8화

식탐이 사라졌어요


쿠바가 변화를 하면서 달러 상점이 도입이 되자 나의 생활에 변화가 왔다. 그리고 ‘나’ 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식탐이 사라진 것이었다.








쿠바에 오기 전까지 나는 식탐이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산층에서 자라난 나는 음식이 없어서 배를 곪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적어도 부모님과 함께 살았을 때에는) 나의 엄마는 음식을 꽤나 잘하시기도 하셨지만 자식들에게는 늘 좋은 음식을 풍족하게 먹이셨기 때문에(우리 형편에서 최선을 다 하셨다는 말이다) 우리 식구 중에서는 식탐이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두 명의 오빠와 나는 두 살 터울이라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나와 오빠의 도시락 6개씩을 매일 아침마다 준비를 하셨다. 그런데 엄마는 막내딸인 나의 도시락에만 고구마튀김 또는 감자튀김을 기본 도시락 외에 따로 싸 주셨더랬다. 그것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무던했던 오빠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불만이 없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튀김기 앞에 앉으셔서 아침마다 나의 고구마튀김을 해 주시던 엄마의 모습이.


당연히 나의 도시락은 늘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고 식탐이 무언지 몰랐던 나는 맛난 반찬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늘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나는 친구들이 좋아하며 잘 먹는 그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많이 먹지 않기도 했다. 당시 급식받던 우유도 필요한 친구에게 주었고 나는 거의 마시지 않았더랬다.(아, 이건 국민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헷갈린다.) 가끔은 내가 마시기 싫어서 준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에 나는 늘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외국에서 혼자 살 때에도 자본주의에는 늘 먹을 것이 풍부했다. 점점 생활이 편리해져 어느 날부터는 버튼 하나면 모든 걸 살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알 수 없는 긴급상황에 대비라도 하듯 거실에 있는 창고에 햇반부터 해서 라면, 참치, 조미김을 포함한 각종 포장된 일회용 식품들과 화장품, 비누, 샴푸, 향초, 디퓨져, 청소용품, 휴지 등 다양한  생필품들을 한 가득 쌓아 놓았더랬다. 그래서 친구들이 와서 그 창고문을 여는 순간, “뭐야, 여기 보물 창고였어?”라고 하며 다 들 놀래곤 했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쿠바에 왔다. 그냥 잠시 놀러 온 게 아니라 살러 온 것이었다. 쿠바에 오기 전에 나는 주로 마켓컬리와 헬로네이처 애플리케이션에서 장을 봤던 터라 정말 버튼 하나로 모든 걸 살 수가 있었다. 그곳에 없는 식품들은 쿠팡에서 해외직구로 구입을 하기도 했다.(쿠바에 오기 전에 나는 저탄고지 식단을 준수했다) 그래서 남편이 한국에 있던 6개월 동안 대형 마트에 가 본 게 손에 꼽힐 정도였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처음 남편이랑 대형 마트에 간 날 남편이 감격하던 그 모습이. 마트 안에 들어가던 순간 남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치 신세계를 맞이한 듯 놀라서 흥분하였는데 남편은 시식코너를 특히나 좋아했다. 음식을 공짜로 준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쿠바에는 공짜라는 게 존재하지가 않기 때문이었다. 쿠바에 돌아온 남편이 친구들에게 한국에서 마트에 갔던 이야기를 해 주면 외국에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쿠바 친구들은 ‘우왕, 정말 그런 세상이 있어?’라는 표정으로 신기한 듯 입을 헤 벌리고 놀라면서 귀엽게들 듣곤 했다.


마트를 처음 갔을 때 놀라던 남편이 너무 귀여워서 웃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렇게 되어 버렸다. 장 보러 멕시코에 가서 월마트나 코스트코를 가면 너무 좋아서 난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마 다음에 한국에 가면 멕시코에서 한 반응보다 더 할 듯하다. 아 맞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비대면이라 시식코너가 없어진다던데… 생각만 해도 몹시 안타깝다. 그리고 나중에는 마트도 점차 사라진다고 하는데 모든 게 온라인이 되고 비대면이 되면 이런 생활들이 무척이나 그리워질 것 같기도 하다.


쿠바에는 한국처럼 모든 걸 한 군데에서 살 수 있는 대형마트가 없을뿐더러 마트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작은 상점에 가면 매대의 반 정도는 텅 비어 있었다. 그건 큰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매대를 채우고 있는 물건들은 어떤 것들일까? 대부분 딱히 필요가 없는 물품이 같은 종류로 소복이 남아있는 경우였다. 예를 들면, 한 종류의 마요네즈만 가득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물건이 들어오게 되면 그 상점 앞에는 줄이 아주 길어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기다려서 살 수 있는 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품질이 아주 떨어지는 다진 고기, 햄버거 패티, 참치 캔, 주스 정도였다. 닭이라도 들어온 날에는 그야말로 상점 앞에 줄로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럴 때에는 늘 경찰이 동원이 되었고 번호표를 나누어 주었다.


물건이 귀한 데다가 사는 것도 힘들다 보니 나도 쿠바 사람들처럼 [생존(하다)-Sobrevivir]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생존]을 위해서 시간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이라고 불리며 돈 주고도 살 수가 없으니 아끼고 쪼개어 최대한 알뜰하게 효율적으로 사용을 해야 하는 <시간>의 가치는 이 곳에서는 똥이 되어 버렸다.


휴지에 관한 에피소드를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휴지를 사러 10군데가 넘는 상점을 다니며 겨우 찾아서 사고 나면 하루가 다 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땡볕에 몇 시간을 다니고 나면 기운이 빠져서 다른 일을 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한 가지 일을 하고 나면 쉬어 줘야 한다. 결국 하루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쿠바에 살고 있는 쿠바인들의 삶이다. 그리고 나의 삶이 되어 버렸다.


휴지에 관한 에피소드는 아래에

https://brunch.co.kr/@lindacrelo/41


쿠바에 도착해서 첫 삼 개월 동안에는 계란을 구경하지도 못했고 계란을 처음으로 사고 난 다음에도 늘 블랙마켓에서 한판에 육천 원이 넘는 비싼 계란을 사야 했다. 가끔씩 시댁에서 배급받은 계란을 나눠 주시기도 하셨지만 시어머니와 할머니도 드셔야 하니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감자도 블랙마켓의 단골 식품이었다. 오죽하면 남편이 계란과 감자로 애정표현을 할까? 계란이나 감자를 구한 날에는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무릎을 꿇고 “자기, 사랑해요!”라고 말하며 계란 혹은 감자를 내 품에 안겨 주는 것이었다.(요즘도 계란과 감자는 구하기가 힘들다.)


그렇게 음식도 생필품도 귀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식탐’이라는 놈이 내 안에 떠억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한참 다니던 작년 여름이었다. 분명히 에어비앤비에서는 부엌이 있다고 적혀 있어서 예약을 했는데 이사를 하고 보니 부엌이 없었다. 성능이 별로 좋지 않아 거의 무용지물인 냉장고와 식탁이 다였다. 집주인은 스페인에 거주 중인 쿠바 할머니였고 그녀의 지인인 젊은 커플이 반을 쪼갠 그 집에 살면서 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부엌은 그들이 사용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에어비앤비에 적혀 있는 내용을 보여주며 설명을 했더니 그릇이랑 솥 같은 걸 몇 개 가져다주었는데 제대로 쓸 만한 게 없었다.


결국 나는 그곳에서 요리를 한다는 건 포기를 했고 보름 동안 밖에서 쿠바 음식으로 대충 때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한식이 몹시나 그리워졌다. 매일 된장찌개가 생각이 났고 하얀 찰진 밥이 그리웠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이 먹은 한식 사진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 사진을 보자 나는 배가 더 고파져서 사진을 보낸 이에게 너무 맛있겠다며 배가 고프다고 이야기를 했더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이 먹자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그때 나는 일종의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몹시 서러웠다. 심지어는 ‘내가 쿠바에 와서 이런 취급을 당하는구나!’라고 하며 한탄까지 하게 되었다. 이게 뭐라고! 이런 먹는 걸로 분노를 느끼고 서럽기까지 하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환경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버린 것이었다.


생필품이야 유통기한이 길기 때문에 멕시코에서 구입해 온 것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사용을 할 수가 있어서 괜찮았지만(휴지와 치약 제외, 지금도 구하기가 힘들다) 음식은 그렇지가 않아서 이 곳에서 구해야 했다. 한식 재료도 모두 멕시코에서 구해와야 하는데 무게 때문에 원하는 걸 다 사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료도 아껴서 사용을 해야 했다.


그렇게 의식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식(食)’을 충족시켜 주는 게 이 곳에서는 쉽지 않자 그때부터 먹는 것, 특히 한식에 대해서는 흥분을 넘어 광분을 하게 되었고 재료가 보이는 대로 한식을 요리하는 게 취미로 발전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각종 김치(배추김치, 파김치, 얼갈이김치, 래디쉬 김치, 양배추 김치, 오이김치, 물김치)를 포함해서 제육볶음, 닭갈비, 삼계탕, 미역국, 북엇국, 만둣국, 된장찌개, 참치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카레와 짜장,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닭튀김, 탕수육, 고구마 맛탕, 근대 된장 무침, 각종 피클과 돼지고기 장조림 등의 요리법을 네이버에서 찾아서 캡처를 해 두고는 그걸 보면서 곧 잘 따라 했다. 쿠바에 없는 수입 사과를 구한 날에는 사과파이와 사과 식초도 만들었다. 파가 있으면 파전을 했고 부추가 있으면 부추전을 배추로는 배추전을 했다.


그러다가 밥솥과 냄비로 제과 제빵까지 도전을 하여 당근케이크부터 카스텔라도 만들었다. 있는 재료, 없는 재료를 끌어모아 장식도 이쁘게 했다. 과자를 굽기도 하였다. 먹는 게 삶이 되자 요리를 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고춧가루가 없자 남편이 구해 온 매운 고추를 말려서는 갈아서 김치를 담았고 두부가 너무 먹고 싶어서 콩을 갈아서 콩비지를 만들었으며 두부에 도전도 했더랬다.(갑자기 콩비지가 먹고 싶다) 두부 콩이 아니어서 결국 두부가 아닌 묵이 탄생을 했지만 그렇게 있는 재료에서 새로운 음식에 도전을 하고 무언가 하나씩 만들어 낼 때마다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했다.


두 종류의 콩으로 두 종류의 묵 탄생


그런데 달러 상점이 생기자 먹을 게 풍부해졌다. 그리고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불법으로만 살 수 있었던 소고기(파라과이산 안심)를 마음대로 살 수가 있게 되었고, 초리소에 치즈와 우유, 요거트에 참치캔과 정어리캔, 둥근 쌀, 밀가루, 냉동 생선, 각종 소스 심지어 다양한 쿠키까지 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달러 상점에는 매대마다 물건이 가득 차 있어서 한 번에 다양한 많은 식품을 살 수가 있었다. 물론 여전히 줄을 서서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는 해야 하지만 몇 번 갈 것을 한 번만 가면 되니 엄청난 시간이 절약되는 셈이었다.


갑자기 소고기가 풍부해지자 소고기 미역국과 경상도식 얼큰한 소고깃국을 맘껏 끓여서 먹을 수가 있었다. 불고기에 소고기 메추리알 장조림도 해 먹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달러 상점이 오픈하기 전에 운 좋게 구했던 아주 상태가 좋은 오징어와 새우가 있어서 오징어 볶음에 새우튀김, 해물탕까지 다양하게 요리를 해 먹고 나니 음식에 대한 갈증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었다. 먹는 걱정이 사그라들자 요리를 예전만큼 목숨 걸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달러 상점에 갈 때마다 살 수 있는 만큼 사 와서(늘 만약을 대비해야 하므로) 싱크대 장에 가득 채워 넣으니 진열이 되어 있는 식품들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그러자 식탐도 사라졌다.


경상도식 얼큰한 소고깃국과 불고기
정어리 김치찌게와 해물탕
만둣국과 북엇국


이 과정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의 식탐이 음식의 결핍에서 생겼던 것이라는 것을. 없으니까, 구하기가 힘드니까 살기 위해서 용을 쓰고 먹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실로 원초적인 것이었다.








식탐과 함께 변한 것이 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시간의 활용이다. 지금까지는 생존을 위해서 줄을 서고 요리를 하고 먹는 것에 대부분의 나의 시간을 사용했다면 식(食)이 충족된 지금에는 먹는 것 이 외에 다른 것에도 시간을 나누어 사용을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요리는 필요한 경우에만 하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건 간단히 먹으면서 시간 활용을 예전에 비해서 잘하게 된 것이다. 물론 한국에 비하면 발끝만큼도 못 따라가지만 예전과 비하면 실로 엄청난 발전이다. 그리고 음식을 못 구해서 걱정하던 시간도 줄어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식이 풍부해진 지금은 (나만) 오히려 채소를 더 많이 먹고 있다. 고기(소고기를 말함)가 충분히 있는데도 말이다. 여름철이라 채소가 많지가 않다는 게 약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이런 이유로 쿠바의 변화는 나에게 여러모로 큰 이점을 가져다준 참으로 고마운 변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없는 많은 쿠바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마냥 좋아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다. 어떤 변화든 어떤 체제든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쿠바인들이 한 번만이라도 나처럼 먹는 걱정, 즉 생존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언젠가 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꿈에서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음식관련 글들은 여기에

https://brunch.co.kr/@lindacrelo/26

https://brunch.co.kr/@lindacrelo/38

https://brunch.co.kr/@lindacrelo/48

https://brunch.co.kr/@lindacrelo/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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