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가 봉쇄된 지도 어느 듯 6개월이 지났다. 이쯤 되면 익숙해져서 일상이 될 만도 한데 오히려 반대다. 내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내 몸이 조금씩 지쳐가고 있는지 낮잠을 세 시간씩 자면서도 잘 때면 기가 다 빠져가는 느낌이다. 그래서일까? 어제도 엊그제도 글을 시작하고는 마무리를 하지 못한 채 또 잠이 들고 말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전 날의 나를 반성하고는 오늘은어제보다좀더나은하루를만들어봐야겠어,라고 하며 파이팅을 외쳐보아도 그 효과가 오래 지속이 되지 않는다. 또 종아리는 왜 이리 잘 붓는지. 몸 탓도 있지만 붓는 건 습기 탓도 큰 듯하다. 그래서 나의 운동은 어느새 ‘생존 운동’이 되어 버렸다.
이런 게 코로나 블루일까?
“언니, 나도 3주 전에 그랬어. 잠이 쏟아지더라고. 그리고 밖에 잘 못 나가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우울해지고. 코로나 블루인가 봐.” 한국에 있는 친한 동생과 얘기하다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몸이 지쳐 가서인지 글을 완성하는 힘도 확실히 떨어진 듯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은데,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런데 시작을 하면 한 장을 넘기지 못한다. 가끔, 아주 가끔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가 노트북을 열면 술술 써졌을 때, 그때의 그 느낌이 간절해져 왔다.
간혹 무기력해지고 무언가를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을 때면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나도 사람이니 이럴 수 있는 거라고, 그리고 마음먹으면 다시 잘할 수 있다고. 그러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힘들게 성취했던 그 과거로 돌아가 보았다.
돈을벌어야겠어,라고 마음을 먹고 서울로 왔을 때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그러자 올케가 흔쾌히 자신의 집에 와 있으라고 해서 염치를 무릅쓰고 둘째 오빠네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당시 오빠네는 방 세 개짜리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가장 작은 방 하나를 나에게 내어 주었다. 가구가 들어가 있어 내 몸 하나 누우면 딱 맞는 크기였다.
아무렴 어때, 내가 살 곳이 있으면 된 거지. 그런데 오빠네에 가 보니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올케의 남동생도 자주 와 있었고 올케의 어머니인 사돈어른도 종종 오셔서 며칠을 계시다가 가시곤 했다. 여기는 그런덴가보군, 하고 생각하고는 그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냈다.
엄마는 올케에게 나를 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아주 큰 김치 냉장고를 하나 사서 보내 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냥 있는 게 미안해서, 많지는 않았지만 매월 일정 금액을 그녀에게 살림에 보태라고 따박따박 건네주었다. 오빠네에서는 씻고 자기만 했고 먹지는 않았다. 딱 한 번 밥을 함께 먹었는데 깜짝 놀라서 그다음부터는 밖에서 항상 사 먹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사돈어른이 계신다고 하면 과일이며 먹을 걸 사서 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을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늘 혼자 살다가 오빠네에 얹혀사는 게 불편해서 나올까 하다가 돈을 모을 때까지 조금만 견뎌보자며 나를 다독여 주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토요일 밤 9시에 오빠가 내 방으로 들어와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린다야, 정말 미안한데 이제 니가 살 집을 좀 집을 알아봐야겠다. 나도 안 이러고 싶은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가 없네. 니한테는 정말 미안하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놀랐지만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면 오빠가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오빠에게 대답했다.
“응, 알겠다.”
오빠가 이 말을 하기까지 올케에게 얼마나 들들 볶였을지 상상이 갔고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오빠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내 발로 알아서 나가는 게 아닌 친오빠 집에서 쫓겨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 서러워서 오빠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고 말았다. 펑펑 울고 난 다음 나는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였다.
‘잘 되어야지, 두고 봐 무조건 잘 될 거야!’
밤새 잠을 설치다가 다음 날 아침 6시에 나는 그 집을 나갔다. 그리고 일주일 간 집을 알아보았고 정확히 일주일 만에 나는 그 집을 떠났다.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서울 생활은 전세 천오백만 원짜리 세 평짜리 옥탑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아무래도 쫓겨 나온 신세다 보니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 편하게 내 몸을 눕힐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옥탑방에 이름을 지어 주었다.
꿈꾸는 옥탑방
나는 그 옥탑방에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들을 ‘드림 노트’에 적었다. 나는 노트에 적은 꿈을 하나씩 이루어나갔고 결국 그 꿈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서울에 올라올 때 엄마가 금강제화에서 구두 두 켤레를 사 주셨다. 그 구두 두 켤레를 번갈아 가면서 신고는 확대 복사한 지도를 들고 경사진 이태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러다 보니 매주 구두 굽을 교체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태원과 한남동에 있는 빌라들에 대해서 정보가 쌓여가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성수동에서 일하던 조건 좋은 부동산에서 나와서 이태원에 있는 한 외국인 렌트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곳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었고 그 사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마음에 든다고 하시며 당장 출근을 하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화려하게 연예인처럼 생긴 그 여 사장님이 마음에 들어서 알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월급이 꼴랑 30만 원에 렌트가 성사되면 수수료를 주는데 그 수수료의 비율이 7대 3이라고 했다.(사장님 7, 내가 3) 지금 생각하면 완전 노예계약이지만 당시 나는 그 일이 몹시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번이마지막기회야,라고 생각하며 일에만 몰두를 했더랬다.
30만 원은 그야말로 밥값이었고 6개월간 나는 그동안 벌어두었던 내 돈을 써 가면서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새로운 일을 개척해 나갔다. 말만 번지르한 그 여사장님은 당시 주식에 빠져 있었고 일에 관련된 걸 물어보면 아는 게 백지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말발과 현란한 몸놀림으로 꾸준히 돈을 버는 그녀를 보면서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일에 무지한 그녀 덕분에 나는 모든 걸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이있어야집을렌트를하고돈을벌텐데고객을어디서구하지?라고 고민을 하던 차에 사무실 책장에 꽂혀있는 ‘프랑스상공회의소’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상공회의소? 하면서 책을 열어보니 약 천여 개의 프랑스 회사 정보가 그곳에 있었다. 아, 이거야! 하면서 그 책에 있는 모든 회사에 전화를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무작위로 전화를 하는 것을 콜드 콜이라고 했다.
전화를 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를 종이에 적은 후 그 종이를 오려서 책상 위에 테이프로 붙여놓았다. 그리고 그 말을 연습하고 또 했다. 그렇게 나는 매일 하루에 몇 군데의 회사에 콜드 콜을 해서 약속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고 또 이태원과 한남동을 돌면서 빌라들을 파악해 나가고 있었다.
천여 개의 회사에 전화를 해서 백 개의 회사 고객을 만드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퇴짜를 맞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매일 꾸준히 프랑스 회사에 전화를 하고 약속을 만든 후 그 회사들을 방문하였다. 그야말로 당시의 나는 오뚝이였다.
당시 나는 힘들게 만든 고객을 꾸준히 유지하고 그들이 경쟁업체가 아닌 나의 서비스를 믿고 이용할 수 있도록 이 방법 저 방법 아주 다양한 마케팅을 시도해 보았다. 그리고 그때 꾸준히 하였던 마케팅이 인사부 담당자들에게 어필이 잘 되어 6개월 만에 첫 번째 일이 들어오게 되었다. 어느 프랑스 회사에 새로운 CFO가 오는 데 그분의 집을 구해달라고 하셨다.
그는 아주 젊은 프랑스인이었고 성격도 좋았더랬다. 하지만 집을 보는 건 아주 까다로워서 적은 금액에 넓은 테라스가 있는 위치 좋은 빌라에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그 금액에 그가 원하는 조건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가 아는 한 없었다. 몇 번을 만나서 이태원과 한남동에 있는 여러 군데의 빌라를 보여주었지만 백 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그가 원하는 지역의 지도를 확대 복사를 하여 그 지역에 있는 모든 빌라를 표시한 후 그 위에 가격대를 적고 렌트 가능 여부를 표시하였다. 실로 엄청난 작업이었다. 그에게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그가 시장을 이해하고 생각을 바꾸거라고 판단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내가 그 지도를 완성 한 날 같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던 동생이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언니, 여기 전화하고 한번 가봐. 새로 나온 신축이라고 누가 알려줬는데 어쩌면 언니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나는 동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당장 전화를 한 후 그 집을 방문하였다. 신축 빌라였는데 실내 공간도 널찍한 데다가 발코니가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가격도 맞았다. 주인아저씨도 서글서글하니 좋으셔서 나는 바로 그 프랑스 고객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회사를 마치고 그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는 그 집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린다, 바로 이거야. 완전 마음에 들어. 이제 계약해.” 그렇게 해서 나의 첫 번째 계약이 이루어졌고 12월 31일에 나의 첫 번째 손님이 입주를 하게 되었다.
그 여사장님과는 8개월을 함께 일했다. 하지만 그녀의 행실이나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입바른 소리를 하던 나는 결국 그곳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곳을 그만두던 날, 혼자서 조용히 외국인 렌트를 하시던 사장님 한 분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 사장님께 나를 소개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 저랑 같이 일 하시죠. 사장님은 물건이 많으시고 저는 손님이 많으니 같이 중개를 하고 수수료는 반반씩 나눠요. 그리고 사무실에 관련된 세금이라든가 각종 공과금은 지금처럼 사장님이 내시는 걸로 하고요. 괜찮으시죠? 저 그럼 내일부터 출근합니다.”
소심하신 사장님은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 깜짝 놀라시면서, “아니, 내가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지…”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나는 그런 사장님을 보고 웃으며, “생각을 하실 게 뭐가 있으세요? 사장님한테도 아주 좋은 조건인데. 사장님 그럼 내일 뵐게요.”라고 말하며 돌아갔고 다음날부터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장님과 함께 일하시던 여자 직원분께서 개인적인 일로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던 것이었고 사장님의 성격상 내가 밀어붙여야 했다. 사장님은 렌트 물건이 꽤나 많으셨지만 고객과의 영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셔서 혼자서 힘들어하셨더랬다. 결국 우리는 서로 도와가면서 일을 하였고 나는 드림 노트에 적은 목표를 하나씩 달성해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와 일을 한번 해 본외국인 이주정착 서비스 회사의 매니저가 내가 일하는 스타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사장님께 내 얘기를 하였고 그 외국인 사장님이 나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점점 수입이 늘어나고 있었던 때라 회사에서 제안한 급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거절을 했더랬다. 그런데 6개월 후 사장님이 다시 같이 일을 할 것을 제안하였고 고민을 한 끝에 함께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회사가 한국에서 일을 한 마지막 회사가 되었다.
이 업계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퇴사하는 순간까지 내 회사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였고 밑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내가 뛰면서 만들어냈던 것들이라 모든 지식과 정보는 고스란히 내 것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때 한 여러 가지 경험들은 지금도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목숨을 걸고 일을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다른 환경이고 이제는 건강도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열정과 패기만으로 마냥 덤빌 수는 없다. 하지만 또다시 나에게 명확한 목표가 생기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주어진다면 예전에 한 것처럼 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두렵지는 않다.
그래, 내가 그때 그랬지. 마음먹은 건 다 해 냈었지. 지금이라고 못할 건 뭐야? 하면 되지.
예스, 아이 캔 두 잇!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고, 현재의 나의 모습이 미래의 내 모습을 만들어 낼 것이다. 조금 느리게 가고, 힘이 부치는 날 들이지만 내 안의 나를 믿으며 지금 시간들이 무사히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독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