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만나서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이 꽤나 있었지만 갈수록 인연의 끈이 단단해지는 그런 사람들도 몇이 있다. 언니는 그중 한 사람이다.원래 나는 언니보다 언니의 하나뿐인 어여쁜 딸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고 쿠바에서 언니의 딸이 갑자기 아파서 언니가 갑작스레 쿠바를 오게 되면서 우리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참 웃긴 건, 언니의 딸이 나에게 '린다 언니'라고 부르고 나는 그녀의 엄마를 '언니'라고 부르고 언니는 딸에게 나를 이야기할 때 '린다 이모'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호칭이 뭐가 대수랴! 우리 셋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면 마치 친구같이 재미있고 대화도 아주 잘 통해서 그런 호칭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있는 게 좋을 뿐이다.
쿠바에서 언니와 나는 함께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고 야채를 사고 블랙마켓에서 랍스터와 문어 그리고 새우를 샀다. 요리를 별로 잘할 것 같지 않게 보였던 언니는 선수급이었다. 별거 없는 환경에서 어느 날에는 고기를 곱게 다져서 야채와 함께 죽을 만들었고 어느 날에는 문어를 다져서 만들었다.
내 생일에는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주었고 밥을 기다리는 동안 오이무침을 슥삭 만들어 내었다. 파김치는 물론이고 처음 해 본다는 랍스터 요리까지 언니의 손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게 꿀맛이었다.
언니와는 처음부터 어색함이 없이 금세 친해졌다. 시원시원하고 솔직 담백한 언니의 성격 덕분이기도 했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친근함이 있어서였을까. 보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꽤나 자주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었고 추억을 만들었다.
그러다 언니가 떠날 날이 왔고 언니가 떠나기 전에 우리 집 옆에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프탑 바에 가서 언니는 맥주를 나는 와인을 마시며 말레꼰 바다 위로 황홀하게 떨어지는 붉은 노을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이런 멋진 풍경을 언니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언니와 얘기하다가 찍은 멋진 장면
한국으로 돌아간 언니는 문득문득 연락을 주셨다. 밥은 잘 먹고 사는지, 먹을 건 충분한지... 쿠바를 잘 아는 언니기에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 언니가 고기 사 먹으라며 돈을 보내 주셨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언니의 따뜻한 그 마음에 눈물이 날 뻔했던 날이었다.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짬뽕이 되어 퐁퐁퐁 솟구쳐져 왔으니.
그리고 내가 한국에 왔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언니는 나를 반겨주었다. 빨리 오라고, 얼른 와서 맛난 것도 많이 먹고 편히 쉬라고. 엄마처럼 나를 살뜰히 챙기는 언니는 정이 참 많았다.
사업을 하셨던 언니는 어떨 때 보면 아주 냉철하고 정확히 꿰뚫어 보는 힘이 있어서 설마 언니 점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떨 때에는 저렇게 순수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해맑은 분이셨다.
언니와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서로의 사정으로 인해서 보는 날이 미뤄지고 있었고 우리는 그저 목소리를 들으며 울먹울먹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린다야, 내가 이런 이런 사정으로 원룸 하나를 렌트했는데 그 방이 지금 비어있어. 그래서 네가 와 있으면 좋을 거 같아. 깔끔하고 안전한 원룸이니까 혼자 조용히 지내기에 좋을 거야."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져본 게 오래되어서 대구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것도 좋았지만 내 인생의 반 이상을 혼자 살았던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아주 소중한지라 언니의 제안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외국이 아니라 한국이고 만약에 부모님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금방 달려갈 수가 있으니 이런 기회가 있을 때 기회를 잡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니에게 그렇게 하겠노라 답을 보내었다.
그리고는 하고 있던 운동이 끝나던 날 트렁크와 배낭 하나를 가지고 새로운 보금자리에 도착을 했다. 아주 오래만의 원룸이었다. 대학교 앞이어서 먹을 데도 아주 많아 보였고 동네에 활기가 있어 좋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있으면 조용해서 책을 보기에도 글을 쓰기에도 좋은 환경이었다.
학교 앞 원룸이라 크지는 않지만 벽지며 타일, 바닥이 모두 새 것이었고 세탁기와 냉장고도 브랜드는 듣보잡이었지만 새 것이었다. 아마도 집주인이 건물을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 아주 깔끔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세탁기, 냉장고, 전자레인지 그리고 책상이 원래 그 집에 비치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외에 의자, 이불, 각종 식기류, 주방용품, 비누, 수건, 작은 상, 전기 주전자, 빨래건조대 등은 언니가 모두 가져다 놓았다. 쓰레기봉투에 행주, 물티슈, 장갑 등 내가 사는 데 불편함을 줄여주기 위해서 언니가 세심하게 하나하나 다 준비를 해 놓으셨는데 그 세심함에 놀라고 말았다.
냉장고에는 동물복지 달걀에 첨 보는 진지향, 생수와 맥주가 준비되어 있었고 찬장을 열어보니 미숫가루 한통에 차도 한통이 놓여 있었다.
언니는 하물며 요가매트까지 가져다주셨다. 나의 필수템인데 언니는 그것조차 알고 계셨던 것이었다!
언니의 센스가 돋보이는 만두카 요가매트
언니와 1년 7개월 만에 재회하던 그 밤, 우리는 대구 막창으로 시작을 했다. 나 방금 대구에서 왔는데... 하지만 막창은 언제나 먹어도 내 입엔 최고다! 고속도로가 막혀서 예상보다 50분 정도 늦게 도착을 한지라 막창 식당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언니와의 첫 끼는 대구 막창 - 이 집 반찬이 맛나서 남은 걸 싸가지고 왔다
언니가 구워주는 막창을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이니 달달하기만 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이야기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나오는데 시간은 왜 이리 냉큼 지나가 버리는지. 식당 벽에 걸려있는 대형 시계가 어느덧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쩐지 사람들이 점점 사라지더라니.
언니가 근처 횟집에서 회를 사서 집에 가서 먹자는 멋진 제안을 하셨다. 학교 앞에는 정말 없는 게 없었다. 고깃집도 횟집도 술집도 카페도 모두 다 있었다. 살을 찌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매일 한 군데씩만 가면 금세 목표 달성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고 마음을 먹었다.
회를 사고 편의점에서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사서 나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언니가 벽에 세워둔 접이식 작은 상을 폈다. 마법처럼 훌륭한 식탁으로 변신을 했다. 포장된 회 접시를 상 위에 펼쳐두고 회 한 점씩을 먹으며 또다시 우리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어쩜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지... 열두 시가 넘었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시며 언니가 급히 집으로 돌아가셨다.
다음 날에는 딸과 함께 커피를 사서 오셨다. 셋이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언니가 줄 게 있다고 하셨다.
"린다야, 딸내미 옷 사면서 네 것도 하나 샀어. 이 옷 보니까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더라고. 절대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가지 지마. 알겠지?"
노란색 랩 원피스였다. 이런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언니와 딸내미가 입은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고 해서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우와~너무 예쁘다! 우리가 정말 잘 골랐네.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냐?"
언니랑 딸내미 둘이서 예쁘다고 난리였다. 내가 봐도 우아하니 이뻤다. 임시 숙소를 마련해 주신 것도 눈물 나게 고마운데 옷까지 사주시고 급기야 저녁에는 반찬을 해서 가지고 오셨다.
이제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을까!
인연이 참 희한한 게, 한국에 도착해서 격리를 했을 때에 숙소를 마련해 주신 분도 쿠바에서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그분 덕분에 모두들 힘들어하는 자가 격리를 나는 아주 행복하게 보냈었다. 강원도 원주 시골의 넓은 별장에서 혼자서 보냈으니 말이다.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것 같기는 한데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가끔씩은 답답하기도 하고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좋은 에너지를 보내 주시고 응원을 해 주시니 초심을 잃지 않고 나의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가다 보면 내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언니의 따뜻한 마음과 정성이 가득한 이 곳에서 내가 원하는 걸 이루게 된다면 누구보다 언니가 기뻐하실 테고 그게 곧 언니가 베풀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에너지로 나의 꿈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