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런 생각도 깊어지겠지. 그녀와 내가 맺은 인연이 그러하니까.
그녀는 내가 일을 할 때 만난 사람이다. 모 은행 차장님인 그녀는 주재원 업무를 하던 시절에 알게 되었다. 주재원들이 한국에 정착을 하게 되면 필수적으로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은행 계좌 오픈인데 그 업무 수행을 위해서 나는 영어를 잘하는 담당자가 있는 은행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녀는 그 일에 완벽한 사람이었다. 평생 은행에서 일을 했던 그녀는 업무는 당연히 능숙했고, 영어 실력도 훌륭한 데다 항상 미소를 띠며 친절하기까지 했다. 더구나 나와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일에 완벽주의자였던 우리는 한눈에 보아도 연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을 함께 일을 하다가 내가 퇴사를 하게 되었다. 퇴사 후 그녀에게 연락을 해더니 함께 식사를 하자고 했고 우리 둘은 밖에서 처음으로 만나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녀가 말했다.
"팀장님, 이제 퇴사하셨으니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팀장님이랑은 오래오래 잘 지내고 싶어요."
그러라고 했지만 나는 언니라는 호칭에 금방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팀장이 아니니까 언니가 맞았다. 그 후 그녀가 언니라고 부르자 나도 "차장님, 잘 지냈어요?"라고 하던 게 "S야, 잘 지냈어?"로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했고 쿠바로 떠나게 되어 소식을 전해 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녀가 가기 전에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광화문에서 만났다. 지금은 다른 지점에서 일을 하지만 당시 광화문에서 일을 했던 그녀와 종로에서 일을 했던 내가 만나기에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카페에 앉았는데 그녀가 선물을 주었다. 고가의 향수로 유명한 곳에서 만든 향초였다. 형부랑 좋은 시간을 가질 때 사용하라고 준비했다고 했다.(그 향초는 아직도 쿠바에서 깨끗하게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의 배려심 있는 선물에 너무 감동을 하며 우리는 앉아서 밀린 수다를 떨었다. 주로 연애와 일에 관한 수다였다.
그러다 나는 쿠바로 떠났고 그녀는 '언니, 잘 지내요? 언니 보고 싶어요!' 하면서 가끔씩 카톡을 보내왔다. 부모님을 조금 일찍 떠나보낸 그녀에게 나이차가 많이 나는 오빠는 거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분이셨는데 그 오빠가 쿠바에 너무 가고 싶어 하신다고 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그녀의 오빠는 아주 좋으신 분 같았는데 그녀를 끔찍이도 아끼시고 가정적이신데 능력까지 갖추셔서 어디 하나 빠질 데가 없는 분이셨다. 게다가 오빠는 아주 잘생기셨다.
'뭐야, 오빠가 왜 이렇게 완벽해? 완전 부럽다!' 오빠가 둘이나 있는 내 입에서 이런 말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녀처럼 오빠와 가깝게 지내지 않고 오히려 올케와 더 친해서 대화도 주로 올케와 하는 편이다.(큰 오빠는 어릴 때 나의 돼지저금통을 삥 뜯기까지 했다)
쿠바에 있을 때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가다가 얼마 전에 드디어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일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일이 생겨서 약속이 한번 연기가 되었다가 이번에는 꼭 만나자고 하며 우리는 한남동에서 만났다.
그녀의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였다. 그 전에는 얼굴에 힘든 게 많이 보였었는데 이제는 안개 걷히듯이 싹 걷히고 온화한 미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S야,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인다."
"언니, 많은 걸 내려놓고 나니까 이제는 마음이 참 편해요."
그러면서 그녀가 또 선물을 주었다. 가을이 없는 쿠바에 사는 나를 위해서 한 폭의 가을을 담은 패브릭이었다. 그녀는 벌써 이 선물을 사놓고 나에게 줄 날만 기다렸던 것이었다.
S의 선물-풀잎 작가 전소영의 패브릭 작품
예전부터 그녀는 취미로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에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니 아예 은퇴 후에 영국에 가서 그림을 더 깊이 공부할 계획까지 세워 두었다.
"언니, 저는 물감 값 벌려고 은행에서 일하는 거예요." 진지한 그녀가 웃으며 농담까지 했다.
그녀는 19세기 영국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그때의 그림을 그리는데 선생님과 함께 한 시간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바쁜 와중에 퇴근 후 일주일에 두 번, 차를 한 시간씩 몰고 가서 세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고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데도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의 작품들
이토록 사랑하는 일이 있다는 건 실로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에 대한 미래의 계획까지 다 세워놓은 걸 보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너무 잘하고 있노라고! 그래서 그녀의 얼굴이 예전과는 달리 편안해진 것이었다.
우리는 우아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선술집 같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녀가 말했다.
"언니, 이제는 이런저런 조건보다는 마음이 잘 맞고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어요. 언니처럼요."
예전에는 결혼할 남자는 경제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사회적인 조건도 맞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살아보니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걸 보면서 본인도 나처럼 마음 맞는 사람이랑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 했다. 굳이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그런 사람과 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내가 봐도 그녀는 지금 은퇴를 하더라도 앞으로 그림 그리며 사는 데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인 준비를 잘해 놓아서 남자의 경제적인 조건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S야, 내가 조단이랑 살아보니까 마음이 맞는 사람이랑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겠더라. 특히 코로나 초기 때 103일 동안 작은 원베드룸 아파트에 있으면서 남편이랑 둘이서만 맨날 봤는데 마음이 안 맞는 사람들은 정말 살기 힘들겠더라고. 근데 난 조단이랑 둘이만 있어도 하나도 안 심심했어. 나를 위해서 조단이 그 더운데 밖에 나가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음식을 구해오면 그 재료를 가지고 나는 집에서 요리하고, 조단이가 맛있게 먹는 거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어찌 보면 참으로 원시적인 삶을 살았지만 난 그것도 좋더라고. 언제 또 그런 경험을 해 보겠어? 그러니 너무 마음이 따뜻하고 잘 맞는 남자, 너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서 살면 좋겠어."
그녀는 내 말에 완벽히 동의를 하며 그랬으면 좋겠다고 했다.
요즘엔 20대들도 돈을 많이 벌어서 40세가 되기 전에 은퇴를 하고 싶다고 하는 게 마치 유행인 것처럼 되었는데 난 그것도 좋다. 하지만 '저 이십 대들은 벌써 돈을 이렇게나 많이 모았는데, 나는 이십 대 때 뭘 했단 말인가?' 하면서 내 인생을 후회하고 돈 많은 그들을 부러워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십 대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충분히 있고 내 인생은 그들의 인생과 다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건 어찌 보면 참 단순하다.
위를 보면 한없이 내가 작아 보이고 내 인생이 후회되고 나의 타고난 조건이 원망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럴 때에는 아래를 한번 보자. 그러면 내가 지금 등을 대고 누울 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를 굶지 않고 먹을 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가 있다.
내가 비교할 건 오직 어제의 나뿐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어제의 나와 비교를 하게 되면 행복 지수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도 높아진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칭찬해본다. 엊그제부터 매일 글을 쓰며 반성을 하다 보니 정신도 차리게 되고 좀 더 발전된 모습으로 노력을 하는 것 같아 아침부터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