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쿠바댁 린다 Aug 31. 2021

코로나 시절의 팔순 그리고 일 년 후



작년 8월이 아빠의 팔순이셨다.

코로나로 한참 세상이 흉흉할 때라 한국에 가지 못했던 나는 쿠바에서 아빠의 팔순을 위해서 서프라이즈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힘든 그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서프라이즈마저 코로나로 인해 갑작스레 공중분해가 되어 버렸다. 몹시 허무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저 쓴웃음으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지...


그리고 겨울에 한국에 왔고 또다시 아빠의 생신이 다가왔다. 여전히 세상은 역병으로 마비가 된 곳이 많았지만 시간만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참 무서운 게 시간인 건가!


아빠의 생신은 음력으로 지내는데 요일을 보니 금요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주말에 모여서 가족들끼리 밥을 먹으며 축하를 했겠지만 이번에는 엄마가 단호하게 자식들 아무도 오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연세도 드신 데가 확진자가 꾸준히 나오는 상황이라 백신 접종을 하지 않으신 엄마 아빠는 모든 게 불안하다고 하셨다. 백신을 맞아도 불안하고 맞지 않아도 불안한 세상이라 이래 저래 불안하신 걸 떨쳐 버리실 수가 없으신 모양이셨다. 무엇보다 엄마는 자식들이 왔다 갔다 하다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시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빠의 생신이 다가오자 올케가 끊임없이 연락을 주었다.


"아가씨, 어무이가 계속 오지 말라고 하시는 데 우짜지?"


"그러게 언니, 내한테도 오지 말라고 하시는데 일단 나는 갈 생각이에요. 언니는 이번에 안 와도 될 거 같은데, 내가 자식 대표로 가서 축하드리고 올 테니까 언니는 오지 마요."


가고 싶다는 올케의 바람은 강력한 엄마의 주장으로 무너져 버렸다. 결국 올케는 예매한 티켓을 취소하였고 용돈과 선물로 마음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달랐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말씀을 듣지 않기가 힘들지만 딸은 상황이 좀 다르지 않나. 더구나 나는 원래 엄마 말을 잘 듣지 않는 성격이라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하셨음으로 불구하고 갈 거라고 빡빡 우기면서 아빠 생신 전날에 도착을 했다. 그랬더니 말씀과는 다르게 두 분 다 아주 좋아하셨다.


부모란 이런 거구나!


엄마, 아빠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식탁에 앉아서 엄마가 새벽에 텃밭에서 따 오신 유기농 야채들과 각종 반찬들을 먹으며 함께 식사를 하였다. 케이크를 사서 초를 불지는 않았지만 아빠가 가장 예뻐하시는 막내딸이 와서 함께 밥을 먹는 게 아빠께는 가장 큰 선물인 것이었다.








쿠바에서 돌아와서 깜짝 놀랐다. 나의 아빠가 예전의 그 아빠가 아니셨다.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안 그러셨는데 기억이 오락가락하시고 정신이 없어지신 것이었다.


이제 여든 살짝 지났는데 아빠가 왜 저러시지? 저러시면 안 되는데...


엄청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병원은 다녀오셨는지 여쭤보니 병원에 가서 치매 검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고 하시면서 괜찮다고 하셨다. 엄마도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며 어쩔 수 없다고 하시고. 내가 보니 괜찮은 게 아닌데, 혹시라도 아빠께 문제가 생기시면 엄마가 젤 힘드실 텐데 하는 생각이 계속 들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렇게 건강하시던 큰 고모가 갑작스레 치매에 걸리시면서 내 걱정을 더 커져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집안에 특별한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안 계셨던지라 큰고모의 치매는 모두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 잠시 대구에 갔을 때 숙모가 말씀하셨다.


"린다야, 네가 쿠바에 가고 나서 엄마랑 아빠랑 밭에 갔는데 아빠가 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멍하게 하늘만 보고 계시더라. 그래서 아주버니 왜 그러세요? 하고 여쭤보니 내가 젤 말이 잘 통했던 딸이 멀리 가 버려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그러시더라.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고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 말씀을 듣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뻔했다. "아, 그러셨구나..."라고 대답을 하며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너무 아파왔다.


내가 쿠바로 떠나고 아빠는 계속해서 쿠바에 관한 정보를 검색하셨다고 했다. 자식이 선진국에 살아도 걱정이 되는 게 부모 마음인데 하나밖에 없는 딸이 저 멀리 외국에, 그것도 사는 게 쉽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에 가서 살고 있으니 아빠는 너무 속상하신 것이었다. 더욱이 뉴스를 볼 때마다 좋은 이야기는 없고 힘든 내용만 보이니 아빠는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혹시 내가 쿠바에 살아서 아빠가 갑자기 저렇게 팍 늙어버리신 걸까?


그 생각을 하니 너무 죄송했다. 나에게는 쿠바가 사랑하는 남자의 나라이고 고마운 나라이지만(물론 힘은 들었지만) 아빠에게 쿠바는 사랑하는 딸을 빼앗아간 원망스러운 나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내가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다고 하셨다. 같이 살지 않아도 차만 타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전화 통화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나라에 있어서 안심이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효도라는 건 아주 심플한 것 같다. 무슨 큰 걸 해 드리는 것보다 안전하게 잘 살고 있다며 얼굴 한번 더 보여드리고 함께 맛있게 밥 먹는 것 그거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이번 아빠의 여든한 번째 생신에는 얼굴 보여드리고 같이 밥 먹은 게 다였다. 자식 대표로 혼자서 가게 되었지만 엄마가 오지 말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겨서 간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모른다. 가끔은 엄마 말을 듣지 않는 게 이런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호호


아마 이번 추석에도 아주 간소하게 지낼 테고 한동안 가족들이 다 함께 모이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엄마, 아빠 살아계실 때 얼굴 도장은 틈틈이 찍어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올케의 부탁으로 봉투에 큰 글씨로 적은 금일봉




작가의 이전글 나도 언니처럼 살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