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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09. 2022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심히 창대하리라

이사 와서 집이 대충 정리가 되자 남편에게 집 내부를 보여주었다. 아직 냉장고랑 식탁 그리고 소소한 물건들이 더 와야 했지만 핸드폰 속에 있는 남편은 연신 예쁘다며 유독 돋보이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보여줄 내부가 금세 끝나자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짜잔~하면서 반짝이는 남산타워를 보여주었다.


"우와!! 자기 너무 예뻐. 또레(Torre-스페인어로 '타워') 남산이네. 멋있어요!"


현관문을 열면 보이는 광경

쿠바에 있는 남편은 서울에 맞이한 새로운 우리 집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그럴 줄 알았다) 결혼하기 전에는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물건들을 하나씩 구입해서 인테리어를 하는 게 나 혼자만의 몫이었지만, 난 이제 결혼도 했는데 또 이 모든 일을 혼자서 하고 있으니 약간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기도 했고. 그래서 남편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자기, 이 책상들 보이지? 이거 나 혼자서 조립한 거야. 이것도 내가 조립했고. 이것도... 자기가 없어서 나 혼자 다 했다고."


남편은 "오~자기,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겸연쩍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본인도 이곳에서 함께 집을 보고 물건을 고르고 정리를 하고 싶었을 테다. 둘이 새로운 동네 구경을 하며 떡볶이도 사 먹고 예쁜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남산도 오르고 싶었겠지.


사실 이 동네는 내 서울 생활을 시작했던 곳이라 완전 새로운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고 그동안 젊은이들로 유명한 장소가 되어버려서 새롭고 예쁜 데가 많이 생겨나 있었다. 그 와중에 15년 전에도 있던 가게들을 보니 어찌나 정감 있고 좋던지.


남편은 없었지만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고자 꼼꼼하게 물건들을 구입했다. 이 집에서는 오래 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꼭 필요한 것만 사기로 했다. 잠시 살든, 오래 살든 필요한 건 다 비슷하다는 엄마의 말씀대로 꼭 필요한 물건들이 계속해서 늘어갔다. 두 개의 방 중에서 하나의 방은 일을 하는 사무실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이사를 해야 한다며 이틀간 휴가를 내었고 그 이틀 안에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역시 한국은 배송 천국이었다. 냉장고와 식탁은 배송에 3~4주가 소요되어 배달을 시켜먹거나 간편식을 사 먹었지만 책상과 의자 등 사무실에 필요한 물건들과 세탁기와 침대는 예상한 날에 와주어 일하고 자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새로운 물건들이 하나씩 채워지고 점점 예뻐지는 집을 보며 혼자만의 뿌듯함을 만끽했다. 쿠바에 살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계부를 썼는데 이번에 이사하면서 꼼꼼한 내 모습을 다시금 확인했다. 글을 쓰면서 기록을 남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확실히 알게 된 나는 구입하는 모든 물건의 목록을 기록해 놓았고, 이 기록들은 훗날 어떠한 방법으로든 도움을 줄 것이다.

이렇게 적은 리스트가 50개를 넘겨버렸다

남산 기운 가득한 새로운 이곳에서 좋은 일들도 듬뿍 생겨나길. 예전에 이 동네에 살면서 잘되어 점점 넓은 곳으로 옮겨갔듯이 이번에도 그런 작은 기적을 바라본다. 물론 그 기적은 나의 부단한 노력과 행동으로 만들어질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교회를 다니지는 않지만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지금은 모든 게 힘들고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지만 이 시간이 지나면 점차 좋은 일들로 그 자리를 채우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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