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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08. 2022

남산이 나에게 준 선물

예전부터 나는 남산이 좋았다. 아주 멀리서라도 남산타워가 보이면 마음이 편해오기 시작했고, 남산은 나에게 홈 스위트 홈과 같은 포근함을 주었다.


두 가지 상반되는 단어 중에서 생각할 틈이 없이 재빨리 내가 더 선호하는 단어 하나를 말하는 게임이 있다. 짬뽕/짜장, 여름/겨울, 밥/빵, 개/고양이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산/바다도 꼭 나온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김없이 바다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섬을 좋아하고 결국은 카리브해에서 가장 큰 섬인 쿠바에 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집에만 꽁꽁 묶여 있어야 했을 때에도 나는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다가 있는 집에 살고 있었기에 크게 힘들지 않고 그 시간을 잘 견뎌내었다. 물이 주는 위안을 충분히 받아서였을 테다.



하지만 서울에서 물이 주는 곳(한강뷰)에 사는 건 지금 내 상태에서는 가능성 제로였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둘러싸인 한국, 그리고 그 수도인 서울에서 나는 산을 선택했다.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고 청계산도 있지만 나에게는 남산이 최고다.


회사에서 다시 일하기로 확정되었고, 파트타임으로 조금씩 일하다가 정직원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전임자가 퇴사 날짜를 당기면서 내 마음도 조급해져 왔다. 집을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라인으로 집을 알아보면서 부동산에 전화해서 상황을 확인해보니 역시 만만찮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부동산 이야기를 할 정도로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 높아져 있었고 나는 그중에서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는 지점에 서 있었다.


동네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아무래도 외곽이 더 저렴할 테라 서울 외곽 동네를 확인해보았더니 내가 타깃 하는 집들은 외곽이나 중심이나 아주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럴 바엔 내가 좋아하는 동네에 사는 게 나았다. 남편의 간곡한 부탁도 있었고.


"자기, 이태원에 살면 안 돼?"


"나 이제 돈이 없어서 이태원은 힘들어. 엄청 비싸거든."


부동산 시세를 알리가 없는 남편은 이태원에 살고 싶다고 했다. 덩치가 크고 색깔이 다른 남편은 외국인들이 있는 곳에서 묻히고 싶어 했다. 한국인들만 많은 동네에서는 누구든 자신을 알아볼 테고 그렇게 관심받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의 나라인 쿠바에서도 남편은 눈에 띄는 체구니 한국에서는 오죽하겠나.


몇 달 전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키가 2cm가 더 컸다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키 나 좀 달라고... 스트레스받아서 키가 커진다면 기꺼이 스트레스받을 자신 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태원에는 영어도 조금은 통하니 영어를 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편은 그곳이 편했던 것이다.


남편이 한국에 6개월 동안 살 때, 우리는 이태원이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친구들과 이태원에서 종종 만났던 터라 이태원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 와서 자리를 잡은 곳도 남산 아래 이태원 근처였다. 주재원들이 고객이다 보니 이태원, 한남동은 내 구역이기도 했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끌리는 경향이 크다고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내가 예전에 살았던 동네, 나도 좋아하고 남편도 원하는 동네를 타깃으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이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세수도 잘 안 하는데 그날은 왜 그랬는지 샤워를 하고 선크림까지 바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혹시나 해서 온라인으로 부동산을 보는데 한 집에 눈에 확 들어왔다. 곧바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는데, 부동산 사장님 목소리며 태도가 맘에 들었다. 그래서 사장님께 말했다.


"사장님, 저 지금 대군데 바로 서울로 올라가서 집을 볼 테니 제가 가는 동안 집 몇 개 더 확보해주세요."


그리고는 옷만 갈아입고 대충 가방을 챙겨 나왔다. KTX를 타고 서울에 도착해 부동산에 도착하니 사장님이 왜 이렇게 빨리 왔냐며 놀라셨다. 내가 볼 집이 총 6개가 있다고 했다. 먼저 내가 원하는 조건을 말씀드렸다.


"사장님, 저는 채광과 환기가 중요해요. 일단 집이 밝아야 해요. 그리고 안전. 이 세 가지가 만족되면 됩니다."


저렴한 가격에 그런 집 찾는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6군데의 집을 다 보고 나니 나도 사장님도 2번이 가장 괜찮다는 의견이었다. 다시 2번 집으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매가 살고 있는 투룸이었는데 방마다 창이 넓었고 부엌에도 창문이 있었다. 집은 작았지만 구조가 깔끔했다. 둘이 살 집인데 클 필요도 없었고 게다가 우리는 이제 절약을 해야 하니 이 정도면 살만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집 앞에 커다란 공터가 있었다.


"사장님, 저는 재택근무라 집에서 일해야 하는데 만약에 저 공터가 곧 공사를 할 장소면 이 집에 사는 게 힘들 수도 있어요. 주인분께 저 공터에 대해서 확인 좀 해 주세요."


확인해보니 예전에 그 공터 자리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있었는데 관리를 하지 않다 보니 문제가 많아져서 주민들의 청원으로 시에서 철거를 했고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다고 했다. 당분간 공사할 계획이 없다고 덧붙이셨다. 나도 그 집에 뼈를 묻을 계획이 아니고 몇 년만 살 거라 괜찮은 것 같았다. 더구나 서울 중심에서 이 금액에 이런 집은 두 번 다시 찾기 힘들 것 같아서 바로 계약하겠다고 했다.


이미 해가 떨어져 밖이 깜깜했던지라, 집주인이 내일 오전 11시에 계약을 하면 안 되겠냐고 하셔서 알겠다고 하고는 남산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가서 하룻밤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친구 집에서 아침을 먹고 부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임대인 부부가 오셨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은 언제나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게 어떤 계약이 되었든 간에.


아무 계획이 없다가 갑자기 온라인에서 집 하나를 보고는 부동산과 전화 통화한 다음, 후다닥 서울에 올라와서 6개의 집을 본 후 다음 날 오전에 계약까지 초고속으로 해치워버렸다. 집 계약을 하고 나니 벌써 서울 시민이 된 것 같았고, 서울에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게 실감 났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계약금을 입금한 후, 집주인과도 인사를 잘 나누고는 부동산을 나왔다. 향후 몇 년간 내 삶의 터전이 될 남산 아래 동네를 천천히 걸었다. 남산 타워가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보호해주는 것만 같았다.


얼마 전에 세 번째 달 월세를 입금했다. 계약날짜보다 일찍 이사 오게 되었고, 혼자 물건들을 사 들이고, 정리하고 조립하고 청소하느라 힘은 들었지만 마무리가 된 지금 난 이 집이 참 좋다. 예전 내 쿠바 집처럼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지는 않지만 현관문을 열면 내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남산타워가 언제나처럼 나를 반겨준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이런 다세대주택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혹시 외풍은 없을지, 오래된 구축이라 문제는 없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구관이 명관인지 요즘에 짓는 집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안정적인 데다 커다란 창문들을 통해 빛도 잘 들어오니 살면 살수록 이번 선택에 대해서 스스로를 칭찬하게 된다.


게다가 동네는 또 얼마나 인간적인지.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나는 게 세련미는 없지만 정감이 있어 이 동네와 점점 사랑에 빠지는 중이다. 매일 문을 열고 남산타워를 보고 남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남산아,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가 나에게 이런 멋진 선물을 주었구나. 앞으로도 우리 사랑 변함없이 이어가자. 고마워 남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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