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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바댁 린다 Mar 16. 2022

살아있음에 오늘도 감사합니다

어느새 나도 잊고 있었다. 그토록 힘들었던 일들이 모두 나에게는 추억으로 남아있기에 뭐든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는 2년 넘는 시간 동안의 삶이었기에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가능하지만 남편에게는 생존을 위한 삶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현지시각 새벽 5시. 소수의 사람들이 보였다. 한 시간 후인 6시가 되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8시가 되자 4블록 가득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다. 남편이 보내온 사진을 보며 내가 잠시 까먹고 있었던 쿠바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쿠바 상점들은 보통 10시에 문을 연다. 9시에 여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오전 10시에 오픈하는데 그런 상점 앞에 새벽 5시 전부터 도착해서 줄을 선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고 내가 쿠바에 살 때에도 그랬는데 코로나 이후는 더 심해졌다. 나는 새벽부터 나가서 줄을 선 적은 없었지만(남편이 하므로) 오전 9시쯤 나가서 일찍 온 사람들에게 몇 시에 왔는지 물어보면 자랑스레 새벽 5시부터 왔다는 얘기를 듣곤 했다.


이 또한 동네마다 다르고 계층마다 다르다. 쿠바에서 여러 해 동안 살고 계신 한 언니는 줄을 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부자 동네에 사는 언니는 줄 서지 않고 물건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돈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커넥션이 필요한 일이었다.


약간 과장을 보태어 말하면 내가 쿠바에 사는 동안 반 정도의 시간은 줄을 서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줄을 많이 섰다. 상점을 가도 줄을 섰고, 은행을 가도 줄을 섰다. 환전을 하거나 인터넷 카드를 살 때에도 줄을 섰고,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도 몇 시간씩 줄을 섰다. 가는 곳마다 줄을 서야 했고, 줄이 짧으면 기뻤고 줄이 길면 한숨이 나왔지만 줄을 섰다. 내일 와도 줄을 서야 하니 그냥 길어도 오늘 서는 게 나으니까. 부자가 아닌 쿠바의 대중들에게 줄 서기란 곧 삶이다.


쿠바 사람들이 인내심이 많고 줄 서기를 좋아해서 줄을 서는 게 아니다. 줄 서면서 가만히 살펴보면 나보다 인내심이 적은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더운 나라에서 그것도 그늘이 없는 곳에서 줄을 서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줄 서는 곳에는 당연히 새치기가 생겨나고 새치기로 인한 싸움도 일어났다. 사람이 사는 곳엔 다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듯 그곳도 그랬다.


코로나로 나는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을 때, 남편이 치즈를 사 온 적이 있었다. 그 치즈를 사기 위해서 남편은 멱살을 잡을 뻔했다고 했다. 앞에 선 사람이 처음에는 한 명을 끼워주더니 은근슬쩍 다른 사람이 왔고 또 다른 사람들이 와서 새치기를 하자 몹시 화가 난 남편이 한마디를 했다고. 집에서 자신만 기다리고 있는 나를 생각하니 이 치즈를 반드시 사야 한다는 마음에 더 이상 불의를 참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구한 귀한 치즈였기에 남편의 이야기는 마치 무용담 같았다.


한 번은 휴지가 떨어져서 두루마리 휴지를 사러 온 동네를 다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한 가게에서 휴지를 발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줄을 섰는데 글쎄, 바로 내 순서에서 판매가 끝이 나 버렸다. 숨겨놓은 물건도 없다고 했다.(분명 있었을 거면서) 그때의 심정이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짧게나마 한국에서 생활을 해 본 남편은 쿠바에 와서 안 해도 될 고생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늘 나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내가 씩씩하게 잘 사는 게 신기하다며 고마워했다. 나는 그런 남편이 고마웠다. 그래서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 남편이 더 힘들어했으니. 게다가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내가 이 남자를 선택했고, 쿠바를 선택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자 갈수록 힘든 상황에 걱정이 된 남편이 나에게 한국에 가서 잠시 쉬다가 올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한국에 왔는데, 몇 달만 있다가 돌아갈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책을 출간하게 되었고, 일도 하게 되어 이제는 한국의 삶에 익숙해져 버렸다.


시간이 금인 한국에 살다 보니 남편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한창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시기에 새벽부터 상점에 가서 줄을 서고 물건을 사다가 하루를 보내는 그 시간이 몹시나 아까워 나는 남편이 하루빨리 한국에 와서 공부를 하고 새로운 일을 했으면 했다. 모든 건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 때라는 생각이 강렬했기 때문에, 아니 이미 늦었을 수도 있지만 지나간 시간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에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린 것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어제 보내온 사진을 보니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에 와서 나와 함께 이 모든 걸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늙고 병든 할머니와 어머니께 새벽부터 나가서 줄을 서라고 할 수도 없으니 자신이 총대를 매고 저러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없으면 없는 대로 친척들이 도와줄 테고 어떻게든 또 살아갈 테지만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함을 넘어선 남편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어서 지금도 줄을 서서 물건을 구하며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선택한 삶이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본인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일 테니 따라줄 수밖에. 만약에 나의 간곡함에 못 이겨 한국에 왔는데 할머니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나 또한 죄책감에 평생 힘들어할 테니 지금은 남편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이해해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 지금은 알 수 없어 답답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이 힘든 날들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발전시키는 좋은 일이었기를 바라본다.


나는 오늘 내가 선택한 삶을 살겠다. 남편과 내가 같은 장소에 있지는 않지만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각자의 상황이 극도로 달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것 같지만 나는 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같은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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