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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Jan 18. 2024

저는 좀 늙고 싶다고요.

방학 6일차

"엄마, 택배 왔어."

친구들과 놀다 들어오던 1호가 커다란 박스를 들고 들어온다.

"어? 그게 뭐야? 엄마 택배시킨 거 없는데?"

"여기 엄마 이름 쓰여있는데? 이거 봐. 보물섬에서 엄마한테 왔지?"

"보물섬?"

1호의 손가락이 가리킨 송장택에 정확하게 내 이름이 적혀 있었고, 아이 몸보다 큰 택배상자 측면에는 '보물섬 보물초'라는 초록색 굵고 큰 글자가 보인다.

"엄마! 보물섬 보물이래"

"야, 똑바로 읽어. 보물'초'잖아."

"그러니까 보물이 초인가 보지. 초대형이라서 '초'인가? 아니다, 초대장인가 보다. 비밀지도가 들어있는 거야. 어때, 내 추리가?!"

"진짠가? 궁금하다, 뭔지 얼른 뜯어보자."

아이들의 대화에 헛웃음이 난다. 너희들이 궁금해하는 중요한 상자 속 내용물은 큰 글씨 바로 밑에 조금 더 작지만 친절하게 쓰여있는데, 추리만 하지 말고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참 좋으련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나 보다. 지난 주말에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을 본 탓일까? 아니면 요즘 읽는 '아르센 뤼팽'의 후유증인가? 최근 본 영화와 책이 이렇게 연관이 되어 순수한 이 어린양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게 될 줄 몰랐다. 내가 산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진다.




"아이~ 이거 뭐야, 시금치잖아!"

"아, 속았네. 이거 보낸 사람 누구야? 우리 보낸 사람한테 전화해서 따지자."

"잠깐만.. 내가 찾아볼게. 여깄다. xxx. 어? 이 이름 할아버지 아냐?"

"어, 맞아. 할아버지께서 친척이 농사하시는 시금치를 사서 보내주신 거야."

매 년 7월에는 단호박이, 1월에는 시금치가 오늘처럼 어느 날 갑자기 배달이 오곤 한다. 아이들은 그동안 택배에서 꺼내어 요리된 것만 보다가 이번에 난생처음으로 이 상황을 맞닥뜨려 기대가 컸겠지만, 13번째 시금치를 받아 본 경험자는 이 택배가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다. 커다란 박스를 보며 겨울이 왔음을 느꼈을 뿐. 시금치와 단호박은 시아버지의 친척이 남해에서 농사를 하시는 것을 팔아주시고자 매 번 수확 때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주시는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 남해의 특산물이 단호박과 시금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매 년 두 번씩 택배를 받을 때마다 여름과 겨울이 왔음을 느끼곤 한다.

택배를 받을 때마다 챙겨주시고 보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지만, 그 마음만큼 걱정도 함께 커진다. 마트나 시장에서 파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고 맛있는 귀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양이다. 한 번 올 때마다 미니 단호박은 2박스씩(약 50개 정도), 시금치는 10KG이 온다. 시금치의 10KG은 채소라서 정말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박스만해도 성인 베개가 10개는 들어갈 정도니까.

시금치 배달왔습니다-!

'아, 이번에도 강제 나눔 해야겠다. 몇 집을 주면 되려나...'

시금치를 봉투에 소분하며 처분을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전화 신호음이 들린다.

"여보세요? 할아버지? 1호인데요, 할아버지가 시금치 보낸 거 맞아요?"

"어, 할아버지가 보냈어. 도착했어?"

"네, 도착했고요. 감사는 한대요, 내년에는 양을 좀 확!! 줄여서 보내주세요.

저는 풀때기가 싫거든요."

"풀때기 아냐. 그거 진짜 맛있는 거다."

"아니, 여기 불로초 시금치라고 쓰여있거든요? '초'가 '풀 초'잖아요. 저 한자 안다고요."

"아이고 우리 1호 똑똑하네. 그럼 불로초가 무슨 뜻인지도 알겠네."

"알죠. '아닐 불, 늙을 로, 풀 초'  해서 늙지 않게 해주는 풀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풀때기 맞죠"

"하하하하하. 그러네. 그래도 몸에도 좋고 맛있는 거니까 많이 먹어."

저는 좀 늙어야 된다고요.

"왜 늙어야 하는데?"

"그래야 키도 커지고, 어른도 될 수 있죠. 저는 할아버지랑 다르거든요? 손주가 키 작은 게 콤플렉스인 거 모르셨어요? 아, 지금 저 조금 서운해지려고 해요. 손주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네."

"아, 그렇지. 할아버지가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다. 하하하, 미안해."

"아무튼 저는 늙어야 되니까 조금만 먹을 거예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까먹지 말고 조금만 보내주세요. 알았죠? "

"오냐, 알았다."

1호의 통화를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다. 그새 전화를 걸어서 능청맞게 따지는 모습에 내 속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아 시원하기도 하지만, 버릇없다고 느끼실까 우려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냥 우리끼리만 투덜거리고 마음 써주신 할아버지께는 보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을 하면 될 것이지 1호의 말대로 얼른 늙어서 그 정도의 눈치는 말하지 않아도 알았으면 좋겠다. 1호의 통화가 끊어질 즈음 부랴부랴 전화를 뺏어 들어 수습하려 진땀을 다. 아버님은 마냥 손주가 귀여워서 괜찮다며 허허허 웃으셨다. 그리고는 "너는 늙으면 안 되니 네가 많이 먹어라." 하시며 전화를 끊으신다.

"아버님, 저도 빨리 늙어서 애들 다 키우고, 이야기보따리 할머니 되는 게 꿈이 라서요..."

1호보다 훨씬 늙은 나는, 센스있게 마음속으로 대답을 해본다.


+) 아, 그나저나 시금치로 뭘 해 먹어야 빨리 소진되려나?


우리는 젊을 때 배우고, 나이 들어서 이해한다. -마리 폰 에브너 에셴바흐


출처 : 블로그 '오현식의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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