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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Sep 14. 2024

깊은 물속에서 찾는 추모공간 이야기

어두운 세상과 밝은 세상을 오가는 전이공간

물은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친숙하면서도 신비로운 물질 중 하나입니다. 무색무취의 이 액체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과 자연 속에 존재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물리 법칙은 종종 눈에 보이지 않기에 간과되곤 합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부력입니다. 부력은 물체가 물이나 공기 같은 유체 속에 있을 때 위로 떠오르는 힘을 말합니다. 중력은 물체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이지만, 부력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해서 물체를 위로 밀어 올리죠. 물체가 유체 속에 있을 때, 부력의 크기는 그 물체가 밀어낸 유체(물이나 공기)의 무게와 같습니다. 즉, 물체가 차지한 부피만큼의 유체가 물체를 위로 밀어주는 힘을 부력이라고 합니다.

이 원리를 활용한 예로는 열기구, 배, 잠수함 등이 있습니다. 이들을 띄우는 힘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부르는 부력의 원리에 기반해요. 중성부력은 부력과 중력이 같아서 물체가 물속에서 뜨거나 가라앉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에 뜨는 성질은 양성부력, 가라앉는 성질은 음성부력이라고 하죠. 예를 들어, 물고기는 부레라는 공기주머니를 이용해 중성부력을 유지해요. (꼬맹이 시절, 학교에서 배워온 부레에 대해 아버지께 더 자세히 여쭤봤다가 물고기 배에서 풍선 두 개가 연결된 것 같이 생긴 부레를 꺼내 대야에 띄워 보여주셨을 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잠수함도 비슷하게 중성부력을 유지해야 물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데, 잠수함 안에 있는 밸러스트 탱크에 물을 넣거나 빼면서 부력을 조절합니다. 스쿠버다이버도 부력조절기와 호흡법을 통해 물속에서 일정한 깊이를 유지하면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프리다이빙에서 음성부력과 양성부력은 다이빙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두 개념을 이해하면 프리다이버가 수면에서부터 깊은 수심까지 어떻게 물속에서 움직이고,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요.  양성부력은 프리다이버가 수면에 가까이 있을 때, 부력이 강하게 작용해 몸을 물 위로 떠오르게 하려고 합니다. 수심이 얕을 때는 몸에 공기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부력이 커서 양성부력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때는 프리다이버가 아무런 움직임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물 위로 떠오르게 되죠. 특히 입수 후 처음 몇 미터 구간에서는 양성부력 때문에 발차기를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하지만 깊이 내려갈수록 몸에 남아 있는 공기가 압축되면서 부력이 점점 줄어듭니다. 일정 깊이에 도달하면 부력보다 중력이 더 크게 작용해, 몸이 저절로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이 상태가 바로 음성부력입니다. 음성부력이 작용하면 다이빙을 할 때 별도의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어요. 이를 '프리폴(freefall)'이라고 하며, 다이빙에서 에너지를 아끼는 중요한 구간이 됩니다.  

프리다이버들은 이러한 양성부력과 음성부력을 잘 이해하고 이용해, 수면에서 발차기로 깊이 내려가고, 깊은 곳에서는 에너지를 아끼면서 중성부력 또는 음성부력을 활용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어요. 이처럼 부력의 개념을 알면, 다이빙의 각 구간에서 필요한 전략을 잘 세울 수 있답니다. 건축에서 이론은 현장상황과 동떨어져 있다곤 하지만, 프리다이빙에서 이 부분에서만큼은 이론이 실제에서 통하는 부분입니다.


프리다이빙을 하면서 물에서 가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입수하기 전, 멍- 하게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준비호흡을 하다 보면 머릿속에서 생각이 제 의지와는 다르게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게 됩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가 제일 좋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경지인 것 같습니다. 특히 물속 깊이 내려가기 전에는 물아래를 바라보며 수면이라는 경계와 양성부력에서 중성부력으로, 중성부력에서 음성부력으로 바뀌는 영역들에 대해 생각해보곤 해요. 다이빙 계획을 세우는 과정이기도 하고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제 멋대로 상상할 수 있는 자유시간이기도 합니다.

저는 딥 다이빙 풀 저 아래를 바라보면서 이탈로 칼비노가 지은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소설 속 도시 '이사우라'를 떠올리곤 합니다. 바다와는 다른, 갇힌 공간 속 깊은 물이 있는 곳. 생각해 보면 철저히 인공적인 공간입니다. 물밖에서의 일상에선 이렇게 많은 물을 깊이 내려다볼 일도, 수압의 변화 기점을 몸소 체험할 일도 없는데, 물에 들어오면 보이지 않던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됩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이사우라를  그린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같은 글을 읽고 모두가 서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당연하면서도 당연하지 않아 신비롭습니다.

이사우라는 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수천 개의 샘으로 이뤄진 도시 이사우라가 지하의 깊은 호수 위에 있다고들 상상합니다... 초록의 도시 가장자리는 땅속에 묻혀 있는 호수의 검은 윤곽을 반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풍경이 보이는 풍경을 결정짓고, 햇빛 아래 움직이는 모든 것이 석회암의 하늘 아래 갇힌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물결에 좌우됩니다." 

보이지 않는 풍경은 보이는 것을 결정짓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사우라에서 살기 위해선 위로 올라가야 하고, 우리도 물속에 있어서만은 살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전설의 프리다이빙 여제 '나탈리 몰차노브'도 깊은 바다에서 다이빙 중 실종되었습니다. 들어갔다 나가는 이어지는 숨처럼 올라와 있으면 내려가보고 싶지만, 내려가면 다시 올라와야 삶이 이어집니다. 

신화에는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가 대표적이고 또 다른 인물로 카론(Charon)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카론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스틱스 강을 건너 저승으로 데려가는 뱃사공으로, 그의 역할은 죽음으로 가는 불가피한 여정을 상징합니다. 카론은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의 개념을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문화와 예술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 구조물을 설계하는 것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이를 공간적으로 표현합니다. 여느 예술가들 같이 건축가들 또한, 카론 신화와 같은 상징적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생명의 순환, 인간의 존재와 한계를 시각적, 공간적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이러한 상징성은 건축물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합니다. 이 글에서는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의 손에서 탄생되었으며 강렬한 기하학적 형상과 함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미적 요소들이 돋보이는 브리온 묘지와, 스페인의 이구알라다에 위치하며 엔릭 미랄레스와 카르메 피뇨스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통해 전통적인 묘지 개념에 도전하는 이구알라다 묘지의 예를 통해 건축이 죽음과 삶의 세계를 어떻게 잇고 표현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카론 신화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의 저서 “물과 꿈”에서 다루는 카론 신화는 물과 관련된 심리적 상징과 인간의 상상력 사이의 깊은 관계를 탐구하는 개념 중 하나입니다. 카론은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스틱스(Styx) 강을 건너 저승으로 안내하는 뱃사공입니다.

단테의 신곡(The Divine Comedy) 1861년 판에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가 그린 카론(Charon) 삽화
고인의 영혼을 안고 출발하는 뱃사공 카론. 고대 루카니아 무덤의 프레스코화.

알려진 세계에는 이름과 주인이 있습니다. 저승을 지배하는 이는 하데스(Hades)입니다. 하데스는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을 가진 죽음의 신입니다. 그리스인들은 하데스가 착용한 마법의 투명 모자 때문에 죽음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온다고 믿었습니다. 이 모자는 '밤의 끔찍한 어둠'으로, 하데스를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모자 주인은 하데스였고 가끔 다른 이가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지혜, 전투, 수공예의 여신인 아테나는 트로이 전쟁 중 한 번 이 모자를 착용하였고, 전령의 신 헤르메스는 거인 히폴리투스와의 전투에서 투명모자를 착용했습니다. 페르세우스는 고르곤 메두사를 죽이러 갈 때 모자의 도움을 받았는데, 고르곤의 석화 시선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메두사를 참수한 후 불멸의 스테노와 에우리알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하데스의 이름은 이후 그가 다스리는 어둡고 우울한 지하 세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데스의 투명 모자를 쓰고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첼리니의 페르세우스(1545~54).

스틱스 강은 하데스 왕국을 아홉 겹으로 둘러싼 신성한 강으로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카론의 나룻배에 타야 합니다. 닉스(밤)와 에레보스(어둠)의 아들이자 히프노스(수면)와 타나토스(죽음)의 형제이기도 한 카론은 덥수룩한 흰 수염과 불타는 눈을 가진 괴팍한 노인으로 묘사됩니다. 명예로운 장례를 치른 망자만이 입에 물린 동전을 통해 그의 배를 탈 수 있습니다.

카론과 프시케(1883), 신화에 대한 라파엘 전파 화가 존 로담 스펜서 스탠호프(John Roddam Spencer Stanhope) 작품.

카론 신화는 물의 심리적 상징과 관련된 두려움, 죽음, 그리고 전이(transit)와 같은 개념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신화적 상징을 통해 물이 우리의 무의식과 상상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합니다.


물과 죽음의 상징

바슐라르는 물이 죽음과 재생의 상징으로서 인간의 상상력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죽음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카론 신화는 이러한 이중성을 반영합니다. 카론이 영혼들을 건너게 하는 죽음의 강, 스틱스 강은 죽음과 이승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물은 여기서 경계를 넘어서는 전이의 매개체가 됩니다.

물은 또한 정화와 재생의 상징으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상징적 의미는 물이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영적 전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카론 신화는 물을 통해 인간의 심리적 상태와 무의식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도구로 작용합니다. 바슐라르는 물이 우리의 무의식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는 새로운 출발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고 보았습니다.


두려움과 희망의 이중성, 상상력의 촉진제, 죽음

물의 이미지가 죽음을 상징할 때, 이는 두려움과 불안을 일으키지만 동시에 정화와 재생의 상징으로서 희망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슐라르는 물이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무의식의 깊은 층을 탐구하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카론 신화를 통해 물이 단순한 물리적 요소를 넘어서 심리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바슐라르는 문학 작품에서 물의 이러한 심리적 상징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분석합니다. 그는 다양한 시와 소설에서 물이 죽음과 재생, 정화와 두려움의 상징으로 나타나는 방식을 통해, 카론 신화가 인간의 상상력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시인과 작가들은 물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경계를 넘는 여정을 묘사하며, 이들 작품에서 물은 단순한 배경 요소가 아닌 중요한 상징적 주제로 다루어집니다.


물리적 존재와 부재의 동시성: 몸 - 죽음의 집

영안(永安). 혹은 영면(永眠). 죽음은 영원한 평화와 안식일까요, 아니면 끝없는 두려움과 슬픔, 혹은 공포의 대상일까요. 건축에서는 어떻게 삶과 죽음을 공간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장 콕토(Jean Cocteau)의 '죽음에 관하여'라는 작품을 통해 독특한 죽음의 관점이 소개됩니다 (Holm, 2007). 콕토는 죽음을 '우리 안에 존재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우리 자신이 하나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죽을 때 떠나가고 문을 잠그는데, 항상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묘사됩니다. 동시에 공포스럽고 매혹적인 모습입니다.

프로이트는 '불가사의'에 관해 쓴 글에서 친숙한 것이 불안정한 것으로 변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숨겨진 것은 그 숨겨짐의 상태로 인해 외부로부터 철저히 안전합니다. 그러나 그 고립의 상태로 인해 위험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불안정한 불가사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한 가지 상태가 가진 이중성, 즉 안전한 것이 위협적인 것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운동의 가능성, 운동의 상태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도 유사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다면 이미 죽음의 존재 그 자체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죽음은 이미 맞이한 것, 이미 있는 것으로 더 이상 여기로 다가올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상태, 즉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삶만으로 뭉친 이에게 죽음은 보이지 않는 자, '하데스'이며, 죽음으로 뭉친 이에게 죽음은, 그에게 삶이 그러하듯,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레이철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의 작품 '하우스(House)'를 보겠습니다. 영어로 '집'이라는 뜻을 가진 '하우스'는 '홈(home)'과는 다릅니다. 하우스는 건축적인 집의 구조를 의미하며, 홈은 개인이나 가족에게 감정적으로 소속된, 안정과 안락감을 주는 공간을 의미합니다. 하우스는 주로 건축적인 측면에서 설명되는데, 건물이나 집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에는 집의 크기, 형태, 구조, 재료 등이 포함됩니다. 사람들이 거주하거나 생활하는 물리적이고도 구체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홈은 더 깊은 감정적인 연결을 의미합니다. 개인이나 가족에게 감정적으로 소속되고 있는 공간으로, 일상생활공간의 기능을 넘어서 개인적인 안정과 안락감을 제공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홈은 사람들에게 안전감을 주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공간으로 집이라는 물리적 구조를 초과하여, 그 집이 주는 감정적인,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단어의 의미를 생각하며 다시 '하우스'를 바라봅니다. 공간을 구체적인 형태로 담아내는 조각이지만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집 ‘하우스'와는 다릅니다. 내부 공간이 없습니다. 작가는 콘크리트로 집 전체를 채운 후, 벽과 지붕을 제거하여 공간의 역형상을 남긴 고체 블록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획기적으로 탐구하며, 공간이 갖는 정체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존재적 상태를 질문합니다. 이 작품은 공간의 물리적 존재와 동시에 부재의 지표로 작용하며, 그 결과 이 집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거주 불능의 상태는 삶이든 죽음이든,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불균형의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몸은 '홈'일 수 없습니다. 텅 비었든 꽉 찼든, 무거움으로 가득 찬 덩어리입니다.

1993년 터너상을 수상하며 '새롭고 인상적인 공공 예술 작품 전체 세대의 선구자'라는 평가를 받은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작품 '하우스'. 사진: 그레이엄 터너/가디언

죽음의 이중성을 대형 콘크리트 조각으로 표현한 이 작품처럼, 실제로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이자 산 자를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묘지입니다.


브리온 묘지

브리온 묘지, 브리온 성역 또는 브리온-베가 묘지로 알려진 이 장소는 이탈리아 트레비소 근처 산 비토 달티볼레에 위치한 브리온 가의 매장지입니다. 브리온 묘지는 카를로 스카르파가 설계한 곳으로, 기념비의 역할뿐만 아니라 빛과 형태, 공간을 조작하여 사람들이 사색에 참여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장소는 불안하면서도 편안함, 그리고 퇴폐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습니다. 건축가에게 주어진 임무는 브리온 가족을 위한 묘지를 설계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묘지는 넓은 부지를 구입함으로써 마을 전체를 감싸는 성소 정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건축가 스카르파는 재료를 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차갑고 회색빛의 시멘트는 무미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주변의 푸른 잔디, 흐르는 물, 연못의 물고기와 수련, 구조물의 개구부를 통해 드러나는 풍경과 하늘로 인해 밝고 가벼운 느낌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감미로운 섬세함을 전달하지만, 재료의 회색빛과 무거움으로 인해 우리는 묘지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곳은 상징성이 강합니다. 서로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두 배우자의 무덤과 결혼반지처럼 교차하는 두 개의 원 모양의 벽을 따라 이어지는 통로, 그리고 물에 잠긴 고요한 교회가 현실에 공존하는 죽음을 건축으로 드러냅니다.


이구알라다 묘지

이구알라다 묘지(Igualada Cemetery)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이구알라다(Igualada)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구알라다는 바르셀로나(Barcelona)에서 남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도시입니다. 묘지는 이구알라다의 도심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시내에서 차로 약 3km 떨어진 산기슭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구알라다 묘지(Igualada Cemetery)는 엔릭 미랄레스(Enric Miralles)와 카르메 피뇨스(Carme Pinos)가 설계한 혁신적인 프로젝트로, 전통적인 묘지 개념에 도전합니다.

묘지는 단순한 무덤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풍경과의 관계이자 망각과의 관계이며, 압축된 기호이자 걷기로부터 시작하는,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의 길을 따라가는 추상입니다.
- 건축가 엔릭 미랄레스

이 프로젝트는 기존의 이구알라다 묘지에 확장이 필요하게 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랄레스와 피뇨스는 방문객들이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삶의 순환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묘지에 대한 시적인 아이디어를 개념화했습니다. 본질적으로 묘지는 주변의 열악한 산업 환경에서 분리되어 장소의 지형적 특성에 집중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묘지는 한때 개울이 흐르던 작은 계곡의 측면에 위치해 있으며, 진입부에서 서서히 하강하는 경사로를 따릅니다.

묘지로 진입하는 과정은 여행을 떠나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영혼의 강은 경사면을 따라 흘러 중앙의 열린 안뜰로 이어집니다. 아마도 이 영혼의 강이 일시적인 휴식을 취하는 공간일 것입니다. 이 설정은 사막의 모래가 조용히 삼키는 강을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이고 시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킵니다. 경사면의 벽감은 마치 이 상징적인 강둑을 긴장시키는 것처럼 옹벽이 됩니다. 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환경에서 건축가는 심오한 인간미를 프로젝트에 불어넣어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해 보이는 작업의 미학을 포착했습니다.

묘지는 수직축이나 수평축으로 움직이지 않고 무정형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정형성이 일상에서 익숙한 형태들로부터 먼 낯섦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죽음의 장소에 거주한다는 강렬한 느낌, 전례 없는 엄숙함과 섞여듭니다.

Floor Plan | © Enric Miralles & Carme Pinos

Sections | © Enric Miralles & Carme Pinos

Roof Plan | © Enric Miralles & Carme Pinos

Sections | © Enric Miralles & Carme Pinos


그러나 무정형성에도 질서와 생명의 기운이 스며 있습니다. 부드럽고 둥근 모서리에서 디자인 영감을 확인할 수 있듯이 디자인은 생명의 우연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흐름을 상징하는 곡선을 강조합니다. 이는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조문객과 방문객들에게 시각적인 매력과 순간적인 삶의 본질을 전달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주요 공간으로 친밀하게 내려와 죽은 자와 같은 차원에 있도록 유도합니다.

적용된 시공법 또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프리패브(Pre-fab) 공법은 건설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위해 자주 사용되는 기술입니다. 그러나 이구알라다 묘지에서는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곳에서 사전 제작은 건축을 단순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건축적 어휘와 깊이 있는 표현을 제공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콘크리트 벽, 돌망태, 강화 흙, 조립식 콘크리트 벽감 클러스터는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지형과 매끄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묘지에서는 매장 공간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조립식 콘크리트 벽감이 앞으로 또는 뒤로 기울어진 클러스터로 배열됩니다. 각각은 조립식 콘크리트 처마 장식과 묘비 명판으로 장식되어 경사면 모자이크 내에 또 다른 모자이크를 만듭니다. 표면은 거칠어 완성도가 떨어지는 듯 보일 수도 있으나 오히려 건축가의 개입이, 이미 존재하는 풍경에 통합되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콘크리트 벽, 돌망태 및 강화 흙 구조물, 그리고 추모의 공간을 위한 상자 모양의 클러스터 등 건축을 이루는 요소들의 의도적인 조화는 자연스럽고 시적인 느낌을 주는 물결 모양의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이구알라다 묘지는 단순히 묘지의 기능을 넘어서, 방문객들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건축이 단순한 물리적 구조를 넘어,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론 신화와 같은 죽음에 관한 상징적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문화와 예술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건축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을 창조합니다.

카를로 스카르파의 브리온 묘지와 엔릭 미랄레스와 카르메 피뇨스의 이구알라다 묘지는 이러한 탐구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브리온 묘지는 기하학적 형상과 자연의 조화를 통해 죽음의 불안과 평화를 동시에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반면, 이구알라다 묘지는 전통적인 묘지 개념을 벗어나, 삶의 순환과 망각을 상징하는 공간을 창조하여 방문객들이 삶과 죽음을 깊이 성찰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두 건축물은 건축이 단순한 물리적 구조를 넘어,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건축이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와 그 한계를 시각적, 공간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됩니다. 건축은 우리로 하여금 삶과 죽음의 이중성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Holm, L. (2007). Vignettes of death: architecture and the death drive. Critical Quarterly, 49(3).

Team, A. (2023, September 6). The igualada cemetery by Miralles & Pinós: Eternal Echoes. https://archeyes.com/the-igualada-cemetery-by-miralles-pinos-eternal-echoes/   


@alohafreed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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