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 화면으로 보았을 때 더 정확한 정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퇴장할 때는 나뭇잎 옷을 입힐 거예요.
자연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게 좋겠지요?
생태 박람회니까요.
…….
저기, 제 말 듣고 계세요? 해운 씨?
아, 예.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너무 피곤해 보여요. 해운 씨에게 제 에너지를
나눠 주고 싶을 정도로. 에너지가 비슷하면
일할 때도 서로 편할 것 같은데.
그 말에 해운은 정신을 차렸다. 공연 의상을 그린 스케치북이 해운의 코앞까지 들이밀어져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나뭇잎 옷을 입은 인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뭇잎이 뾰족하거나 납작하지 않고 동글동글했다. 회오리감자나무였다. 회오리감자 나뭇잎을 단 채 인물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물과 주변 환경이 비슷해 보일 것 같았다.
다온을 슬쩍 쳐다보니 눈썹이 축 늘어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 잃은 병아리 같았다. 해운은 눈을 크게 뜨고 스케치를 살펴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티 사이즈로 들이켰는데도 잠이 깨지 않았다. 빨리 정해진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가서 눕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었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일할 때도 집에 있는 침대 생각만 했다. 처음에는 만성 피로인가 싶어서 한의원에 가 한약도 지어 먹고 링거를 맞아 보기도 했다. 영양제도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 수시로 눕고 싶은 마음을 고쳐먹기는 쉽지 않았다. 백팔십 센티미터에 가까운 키에 현장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운동하지 않아도 잔근육이 붙어 있고, 선크림을 챙겨 바르지 않아 피부도 그을린 편이어서 운동선수나 헬스 트레이너로 오해받곤 했기에 약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해운은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체력이 아닌 심력의 문제였다. 더 이상 열심히 하고 싶지 않은, 열정을 쏟고 싶지 않은 마음의 문제였다. 자신은 남들보다 심력이 달리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에너지의 총량이 많지 않아서 그걸 일하는 데 모두 쏟는 바람에 다른 일에 쓸 에너지가 줄어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연애에 쓸 에너지도 없었고 공적이든 사적이든 만나는 사람이 무슨 극성인지 알 생각도 안 했다.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기 위해 서로의 극성을 물어보거나 슬쩍 손을 뻗어 극성을 알아보는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해운이 플러스성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모두 그에게서 다정함을 기대하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함께 프로젝트를 하게 된 다온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먹는 걸 뻔히 보고서도 피로를 해소하는 데 좋을 것 같다며 유자에이드를 건넸다. 쉬는 시간에 벤치에 누워 있으면 조용히 양산을 받쳐 주기도 했다. 어깨까지 오는 곱슬머리를 늘 반묶음으로 하고 다녔고, 총총걸음을 할 때마다 묶인 머리가 나풀거렸다. 그렇게 휘날리는 머리가 눈앞에서 자주 보이니 안 보이면 서운해졌다. 그래서 평소답지 않게 용기를 내 말했다.
줄 수 있으면 주세요, 그 에너지.
받고 싶어요?
네, 받고 싶어요.
잠깐만 이리로 와 봐요.
해운은 다온에게 다가갔다. 목소리가 커서 그냥 말해도 잘 들릴 것 같은데, 다온은 굳이 해운의 귀에 자신의 손바닥을 대고 말했다.
남은 회의는 산책하면서 할래요?
호숫가에 박람회 마스코트를 만든다던데.
아, 이번에 왜가리가 마스코트래요.
왜가리라는 단어가 웃겼는지 다온이 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해운도 미소를 지었다. 해운이 웃는 걸 본 다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었군요!
그 말에 해운은 더 크게 웃었다.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웃지 않는 것을 택했는데, 사흘 분의 에너지를 한꺼번에 쓴 것 같은 웃음을 터뜨리고 나서도 몸에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잠도 깼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맑아졌다. 해운과 다온은 호숫가까지 함께 걸어갔다. 다온의 팔이 해운의 팔에 닿았다. 그 순간, 두 사람의 팔이 더 가까이 붙었다. 전류가 다시 느껴졌다. 팔뿐만 아니라 두 몸도 달라붙었다. 극성이 에너지를 전달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몸이 닿는 순간 활력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링거를 맞았을 때처럼 몸에 힘이 들어갔다. 보폭이 넓어지고 발이 가벼워졌다. 피도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다온은 인간 링거일까? 마시는 링거까지 나왔지만 접촉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링거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며칠 동안 철야를 하다가 밀린 잠을 스무 시간쯤 자고 일어났을 때의 상태 같았다. 아무래도 마음의 영역인 듯했다. 이 사람이라면 자신도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운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다온에게 물었다.
우리 한번 만나 볼래요?
다온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잠시도 고민하지 않았다. 놀이기구라도 타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웠다. 해운은 이왕 몸이 붙은 김에 더 붙어 있고 싶어 얼굴을 다온 쪽으로 기울였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모처럼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생겼다. 의상을 만들기 위해 새로 주문한 원단을 싣고 오는 트럭 타이어에 문제가 생겨 정비소에 들러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에 차질이 생기고 진행이 밀리는 것이지만 다온의 눈이 반짝거리고 볼이 살짝 붉어졌다. 일을 기준으로 한다면 다온의 입장에서는 재미없는 상황이지만 지금은 다른 재미가 더 급했다. 일정이 늦춰진다는 말을 듣자마자 연락해서 해운의 숙소에서 몰래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다온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에 가는 척 지갑과 휴대폰만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스태프 한 명이 다온을 불렀다.
“저희 케이크 맛집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근처에 당근 케이크가 진짜 맛있는 곳이 있대요. 가격도 싸고.”
“아뇨, 전 피곤해서 숙소에서 잠시 쉬다 오려구요.”
“앗, 다온 씨가 케이크를 마다하다니 진짜 피곤한가 봐요.”
“요새 좀 무리하긴 했지. 저희는 그럼 다녀올게요. 이따 봬요!”
“케이크 좀 사다 드릴까요?”
“아뇨, 전 밥을 많이 먹었더니 배불러서 괜찮아요. 맛있게 먹고 와요.”
다온은 디저트를 먹으러 가는 스태프들에게 팔을 높이 들어 인사했다. 겨우 혼자가 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스태프들이 백 명 넘게 있다 보니 점심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떼로 몰려다니게 되고 무리를 이루게 되어서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드는 것은 더 어려웠다. 해운과 다온은 둘 다 책임자이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호출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수록 짬을 내고 싶은 마음은 커져 갔다. 점심시간에는 밥차가 오거나 도시락을 줄 때가 많아서 다른 사람들과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대기 시간이 갑작스럽게 생기면 숙소에서 만났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서로의 숙소를 번갈아 가면서 들렀다. 똑같이 생긴 숙소를 바꿔 가며 가는 게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작은 주방에 침대와 화장실, 작은 식탁과 2인용 소파가 있는 원룸형의 단순한 구조였지만 달라붙은 몸들이 하나인 것처럼 있으니 넓어 보였다.
다온은 해운의 숙소까지 뛰어갔다. 가면서 미리 연락했더니 해운이 숙소 문을 조금 열어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나 벨 소리도 눈치 보여 쓴 방법이었다. 다온은 재빨리 해운의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 이거 약간,
여행지에서 만나 연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내 연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기분이 묘한데요.
그 말을 들은 해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해운은 주방에서 포도를 씻고 있었다. 예전에는 현장에서 주는 밥과 간식만 먹었지만 다온에게는 뭐든 주고 싶었다. 정말로 다온과 붙어 있을 때마다 에너지를 옮겨 받기라도 했는지, 퇴근하고 나서 마트에 갈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숙소에 올 차례에 대비해서 이틀에 한 번씩 마트에 들러 다온을 위해 과일과 간식들을 사는 것이 즐거웠다. 집 냉장고보다 숙소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식이 많을 정도였다.
포도를 가져온 해운은 소파에 앉아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온이 해운의 허벅지에 눕자 극성이 생겨 머리와 허벅지가 달라붙었다. 해운은 허벅지를 베고 누운 다온의 입에 포도를 한 알씩 넣어 주었다. 다른 손으로는 다온이 뱉어 낸 씨를 차곡차곡 모았다. 누운 자세로 뱉어 낸 씨가 다온의 얼굴이나 바닥에 떨어지면 별것도 아닌데 한동안 웃느라 눈물까지 빼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 다온은 평소보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고 해운은 한 톤 높아졌다. 다온이 말한 대로 에너지가 조금씩 맞춰지는 것 같았다.
스물여덟 살 동갑이지만 일로 만나서 그런지 존댓말을 쓰는 것도 간지러우면서 좋았다. 가끔 자신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다온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해운은 가슴이 떨렸다. 발랄한 모습도 좋았지만 그 모습은 뭐랄까, 자신을 연구하는 과학자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았다. 그런 다온을 더 오래 보고 싶었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열흘, 그중 벌써 여섯 번째의 만남이었다. 이렇게 잠깐씩 만나는 것도 좋았지만 좀 더 욕심이 났다. 프로젝트 기간이 며칠 안 남았기에 그 안에 이 관계를 굳히고 싶었다. 소꿉장난 같은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진지하게, 또는 진득하게 만나고 싶었다. 두 사람의 몸은 빈틈없이 달라붙어 있었지만, 부족했다. 다온은 보고 있어도 목이 마르게 했다.
해운이 자기 입에 포도를 넣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다온의 입에 마지막 포도를 물려 주며 말했다.
오늘 밤에 일 끝나고 만날래요?
예? 의상 제작 시간이 빠듯해서
퇴근을 언제 할지 모르는데…….
상관없어요. 기다릴게요.
그냥 이렇게 낮에 잠깐씩 보는 게 좋은데.
아쉬워요. 쉬는 시간은 너무 짧고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까.
다온 씨를 제한 없이 더 오래 보고 싶어요.
……일단은 지금처럼요.
낮에만 보는 거로요?
네, 밤에 보는 건 싫어요.
다온의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얼굴에 한기가 도는 것 같았다. 해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온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밤에 만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다. 마음만 급했다가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극성 덕분에 둘이 있는 시간 동안 밀착되어 있지만 마음까지 같은 거리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해운은 낮에만 만나자고 하면서 후퇴했다. 그제야 다온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일터로 복귀한 뒤에도 해운은 다온의 모습을 좇으며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음료를 주문할 때는 하루의 커피 할당량을 다 채운 해운을 배려해서 유자에이드를 시키기도 했다. 사약 같은 커피들 사이에서 태양처럼 빛나는 유자에이드를 보며 해운은 마음을 달랬다. 밤에 만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낮에 만나는 것도 저 유자에이드처럼 얼마나 빛나는 시간들인가 하고 말이다.
해운도 유자에이드의 힘을 빌려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의상 제작 때문에 다온의 마음이 급해 보였지만 사실 더 급한 건 해운이었다. 인공 정원 같은 느낌을 최대한 빼고 싶어서 회오리감자 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들이나 식물들의 모양을 가공하지 않았는데 공연 분위기와 어울릴지 고민이었다. 행사장에 흔히 있는 포토존처럼 하트나 동물 모양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해운은 다온에게 다가가 고민을 말하면서 의견을 물었다. 다온은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정원을 자연적인 모양으로 두는 대신 자신이 의상을 더 세련되게 다듬어 보겠다고. 행사의 하이라이트로 식상하게 불꽃놀이를 하지 말고 다른 걸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부대 행사는 자신의 영역이 아닌데도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는 모습이 다온다웠다. 의상을 어떻게 다듬을지 얘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다른 스태프들이 와서 모델 피팅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다온은 자리를 떴다. 공식적으로 미팅 시간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부족했다. 중요한 협업인 만큼 다온과 일 얘기를 따로 더 하고 싶었다.
다온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동안 정원의 콘셉트도 정했다. 비단 정원을 만들기로 했다. 흙 위에 붉은색 비단과 흰색 비단, 푸른색 비단을 번갈아 깔면서 인물들의 감정을 표현할 생각이었다. 물론 흙을 완전히 가리는 것이 아니라 흙도 보이게 하면서 비단과 공존하게 하는 게 핵심이었다.
다온이 오자마자 퇴근하고 이 얘기를 더 이어서 할 수 있을지 물었다. 다온은 고개를 저었다. 저녁도 먹어야 할 텐데 저녁 먹으면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저녁을 간단히 먹고 운동할 거라면서 거절했다. 운동을 싫어하는 자신과 달리 - 해운은 누워서 맥주를 마시며 다른 사람이 대신 경기하는 것을 보는 걸 좋아했다 - 다온은 거의 매일 저녁에 러닝을 하고 있었다. 그 많은 관계자와 스태프 중 출장을 와서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부진 몸을 지닌 것도 그 덕분인 것 같았다. 해운은 조경기능사 일이 움직임이 많기도 했고, 음식 조절은 신경 써서 한 덕분에 아직 운동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서 러닝을 같이 하자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거절하는 말투는 다정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답은 명확했다. 아직 밤에는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서운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다온은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와 이따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물론 이때의 ‘같이’는 단둘이 먹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는 상태에서 마주 보고 앉아 먹자는 거였다.
그 뒤에도 해운이 조심스럽게 밤 데이트를 얘기했지만 다온은 계속 거절했다. 거절의 말도 익숙해지지 않고 그때마다 아팠다. 폐막식이 다가올수록 대기 시간은커녕 쉬는 시간도 거의 없었다. 호숫가를 산책하는 여유도 찾기 힘들었다. 이렇게 만나는 게 감질맛 나기도 했다. 해운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폐막식이 끝나면 둘 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텐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나를 모른 척하면 어쩌지? 여행지에서의 하룻밤 꿈처럼 행사가 끝난 뒤에 나를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평소에는 생각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했는데 다온과 관련된 일이라면 망상이 우주 끝까지 뻗어 나갔다. 그동안 자신은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사는 거고, 귀찮아서 스스로 죽지도 못해 겨우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계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폐막식이 끝나기 전까지 다온과의 관계를 굳히고 싶었다. 끈끈한 사이로 만들고 싶었다. 다온은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닌 것 같았다. 극성 때문에 몸이 붙어 있을 때는 안심이 되었지만 떨어져 있을 때는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