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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Oct 15. 2024

극성의 사랑 (3)



* PC 화면으로 보았을 때 더 정확한 정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해운은 밤 열 시쯤에 자리에 누웠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누워 있는 걸 좋아하는데도 지금은 누워 있기보다는 다온과 함께하고 싶었다. 다온의 생각을 하는 대신 낮에 해결하지 못했던 일에 관한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뭇잎 옷만 만드는 게 아니라 깃털 옷으로 식물을 표현하는 것이다. 정원에 비단을 깔아서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루었으니 의상도 자연과 인공을 결합하면 좋을 것 같았다. 생태 박람회이므로 당연히 가짜 깃털로 표현해야 했다. 박람회의 마스코트인 왜가리의 깃털을 옷으로 나타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왜가리들이 호숫가가 아닌 비단 정원 위를 우아하게 걸어 다닌다면 정원인지 늪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을 듯했다. 투명한 비단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았다. 땅이지만 안개가 낀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었다. 투명한 비단을 사뿐하게 거니는 왜가리의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 생각을 얼른 다온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해운은 튕기듯이 일어났다. 잠옷으로 입었던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만 신고 다온의 숙소까지 달려갔다. 이렇게 뛰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내일이면 머릿속에 번뜩이고 있는 생각들이 달아날 것 같아 빨리 말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이 핑계로 다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가기 전에 전화나 메시지를 했어야 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다온이 거절할 것 같았다. 밤에는 만나지 말자고 했지만 이 생각들을 활자나 목소리로만 박제하고 싶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하더라도 문 앞까지는 가야 할 것 같았다.


  다온의 숙소까지는 뛰어서 가니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문 앞에 도착한 해운은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이른 시간이 아닌 만큼 다른 숙소에 소리가 들리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은밀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두근거리고 짜릿하기까지 했다. 노크 소리를 작게 했는데도 바로 들었는지 문 안쪽에서 다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하고 말하는 목소리는 유난히 낮았다. 냉정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해운은 아차 싶었다.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몸을 돌렸을 때 문이 열렸다. 다온이 자다 깬 것 같은 얼굴로 해운을 쳐다보았다. 해운은 무심코 다온의 팔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해운의 몸이 뒤로 밀렸다. 동시에 다온의 몸도 반대쪽으로 밀렸다. 자석의 같은 극끼리 붙였을 때 서로 밀어내는 것처럼 사이가 벌어졌다. 해운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났다.     



어?



                                                                                                                                                              …….     



  순식간에 뒤로 밀려난 해운은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른 가까운 나이에 볼썽사납게 넘어졌다는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당황스러움을 먼저 느꼈다. 다온은 서로가 밀려날 것을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약간 비틀거리다가 곧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섰다. 해운이 넘어진 것을 보고도 다온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대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해운은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몇 번이나 들어갔었던 다온의 숙소지만 오늘만큼은 처음 가는 것처럼 낯설었다. 다온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다온은 팔짱을 낀 채 해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프라이즈는 실패한 것 같았다. 밤에 보는 다온의 얼굴은 낯설었다. 여기까지 뛰어올 때만 해도 기대로 부풀어 올랐던 가슴은 찬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식었다.


  다온은 팔짱을 풀지 않은 채 해운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낮에만 만나는 다정함이 좋아, 

                                                                                            아니면 밤에도 만나는 솔직함이 좋아?

                                                                                            나는 낮에는 너와 다르지만, 

                                                                                            밤에는 너와 같아. 

                                                                                            너와 다른 내가 좋아, 

                                                                                            너와 같은 내가 좋아?     



  다온이 해운에게 처음으로 반말을 했다. 누가 빙의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반말로 길게 얘기한 내용도 바로 알아들을 수 없어 수수께끼 같았다. 해운이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있자 다온이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밤에 만나지 못한 이유가 있어요.

                                                                          전 다른 사람과 달리 낮에는 마이너스성이 되고, 

                                                                          밤에는 플러스성이 되는 특이 체질을 지니고 있어요.     


......지금은 플러스성이라는 건가요? 


    

                                                                                        네, 지금은 당신과 같은 극이에요.

                                                                                        한마디로 서로 가까워질 수 없다는 거죠.

                                                                                        이중 극성이라고 들어 봤어요?    


 

  해운은 고개를 저었다. 플러스성과 마이너스성을 모두 지니는 이중 극성이라니, 처음 들었다.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 하나 닿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사이에 습관이 되었는지 마주 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몸이 다온 쪽으로 기울어져서 서 있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데도 다온이 멀어 보였다. 다온이 자신에게서 점점 밀려 나가는 모습이 착시 현상처럼 나타났다. 눈앞이 아찔해서 해운은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가 떴다.


  두 사람은 소파의 양쪽 끝에 앉았다. 다온은 해운의 얼굴이 아닌 정면을 본 채 이야기했다. 고개를 돌려 다온의 옆모습을 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거실에서 다온의 흰 얼굴만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러웠어요. 

                                                                                 이중 극성 때문에 연애에 계속 실패했었거든요.

                                                                                 좀 나중에 밝히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난 그것도 모르고……. 


    

                                                                                            대부분 다 그렇더라구요. 너무 급해요.

                                                                                            밤에 보는 전 당신을 닮아 있어요.

                                                                                            지금의 전 당신의 거울이에요.   


  

전 제가 다정해졌다고 생각했는데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부터.    


 

                                                                                    그건 제 대사인 것 같은데요.

                                                                                    아직 멀었어요. 지금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무작정 찾아왔잖아요.

                                                                                    제 상황이나 마음은 배려하지 않고.   


  

  해운은 입을 다물었다. 다온의 말은 사실이었다. 급하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다온이 지금 만날 수 있는 상황인지, 아니 만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왔다. 막상 자신을 보면 반가워할 것이라고 함부로 짐작하면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해운이 묵묵히 있자 다온이 다시 말했다.  


   

                                                                                                  선택해요.

                                                                                                  나를 닮은 사랑을 하든지,

                                                                                                  상대방을 닮은 사랑을 하든지.


     

…….     



                                                                                                ......쉽게 선택할 건 아니겠지요.

                                                                                                당분간 시간을 좀 갖도록 해요.     



  같은 극성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해운을 더 완벽하게 밀어내는 말이었다. 해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다온의 숙소를 나왔다. 자신의 숙소까지 돌아오는 길은 평소보다 몇 배는 늘어졌다.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여름의 기운이 남아 있어 공기가 텁텁했는데도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팔뚝을 계속 쓰다듬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잠이 오지 않아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다음 날, 낮이 되어 서로 다른 극성이 되었지만 다온은 해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짓던 웃음도 보여 주지 않았다. 일할 때만 나오던 표정들이 해운을 볼 때도 나왔다. 입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해운은 그 표정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면 다온의 정수리가 보인다는 것이 함정이기는 했지만. 작고 동그란 정수리를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얼마든지 붙을 수 있는 낮이었는데도 냉기가 흘렀다. 다온은 일할 때 필요한 말만 했다. 해운이 손을 뻗으면 몸이 달라붙기는 했지만 표정은 얼어붙어 있었다.


  계속 그런 표정일까 봐 무서웠다. 다정한 표정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해운은 억지로 힘을 주어서 몸을 뗐다. 어젯밤처럼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다온은 해운 쪽을 보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해운의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다른 스태프들 사이에 껴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해운은 애꿎은 나무젓가락만 입에 넣고 씹었다. 젓가락에서 씁쓸한 맛이 났다.     






  아까운 사흘이 지나갔다. 폐막식 공연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다온과 사이가 멀어진 것만 해도 억울한데 더 억울한 일이 생겼다. 오전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비단 정원 쪽에서 불이 난 것이다.


  “여기요, 여기! 무대 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어요!”


  다온과 가장 가까이에서 일했던 스태프가 무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불은 아니었지만 검은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한 스태프가 119에 신고를 했다. 몇 명은 소화기를 가져와 뿌리고 있었다. 해운도 멍하니 서 있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는 소화기가 없어 숙소로 달려가 양손에 소화기를 들고 왔다. 소화기 하나를 옆에 있던 사람에게 건넨 뒤 손에 들고 있던 소화기의 호스를 공중에 뿌렸다. 그러다가 주변에 다온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숙소에서도 다온을 보지 못했다. 해운은 소리를 질렀다.     



다온 씨! 다온 씨! 어디 있어요?     



  다온이 없다는 말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서 다온을 찾기 시작했다. 무대 쪽에는 사람이 없다고 소리치는 무대 감독의 말에 해운은 안심했다.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오고 있었다. 소방차가 오자 불은 금방 꺼졌다. 불이 잘 붙는 재질이라 비단으로 만들어진 무대는 잠깐 사이에 완전히 사라졌다. 내일 리허설 때 동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가까이 두었던 공연 의상들도 함께 타 버렸다. 다온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도 아니고 일할 때 태만한 사람도 아닌데 자신 때문에 사라진 것인가 해서 해운은 애가 탔다.


  “다온 씨는 대체 어디 간 거야?” 

  “그러게. 아무 데서도 안 보이네. 불이 나서 옷까지 다 불타 버리니까 무서워서 도망간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오늘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설마 공연 공포증 같은 건가?”

  “헉, 그런가? 막상 만든 의상을 내보이려니 무서워서 도망간 거지.”

  “경력이 적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프로답지 못한 일을 할 리가 있겠어?”

  “맞아, 뭔가 사정이 있겠죠.”


  스태프들이 수군거렸다. 해운은 눈을 감았다. 다온이 그렇게 무책임할 리 없었다. 섣불리 행동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제야 휴대폰으로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났다. 119에 신고하는 사람을 보고도 휴대폰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다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메시지를 보내려고 할 때 다온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금방 갈게요. 다온은 앞뒤 설명 없이 그 말만 보내고는 다시 연락을 받지 않았다. 불이 난 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 상황을 간단히 적어 보냈다. 곧바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오늘의 일정을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에너지가 부족했다. 다온을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고만 싶었다.


  결국 해운은 뒷정리를 다른 스태프들에게 맡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 위에서 내내 누워 있었다. 밤이 될 때까지 팔을 이마 위에 댄 자세로 머물러 있었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다온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온을 기다린 지 꼬박 열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다온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대와 의상이 없어졌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저 곧 가요. 솔직하게 다정해지고 싶어서 

                                                                                잠시 거리를 둔 거예요.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다온이 옆에 없는데도 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밤인데도.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어진 것 같았다. 다온을 좋아하는 것은 극성과 관계가 없었다. 그저 함께하고 싶었다. 해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에서는 짠맛뿐만 아니라 쓴맛도 함께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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