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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Oct 15. 2024

극성의 사랑 (4)



* PC 화면으로 보았을 때 더 정확한 정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주시 국제 생태 박람회 폐막식 하루 전날무대에 화재   

  

  9월 5일부터 9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미주시 국제 생태 박람회에서 폐막식을 하루 앞두고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으나 리허설 전 무대와 의상이 전소되어 폐막식 공연 개최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국제 생태 박람회 폐막식 화재 원인은 인재…… 모닥불 번져     

행사 현장의 관리 부실과 점검 소홀에 대한 비판 여론 들끓어     

모닥불로 야간 작업을 진행해야 했던 노동 환경에 대한 비판 쇄도        



  

  다음 날에도 일정이 중단되어 해운도 현장에서 오전부터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야외무대는 그슬린 비단 조각들이 흙과 섞여 있어 폐허처럼 보였다. 의상도 다 타 버린 것과 일부가 타 버린 것들이 섞여 있어 무더기를 이룬 것만 보면 쓰레기 더미 같았다. 그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곧 청소업체 사람들이 와서 불에 탄 흔적들을 치울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대 감독도 기자들의 연락과 경찰들의 조사에 대비하느라 어제부터 현장에 없었다.


  화재 원인은 근처에서 피웠던 모닥불 때문이었다. 무대 설치를 마무리하기 위해 밤에 작업을 하다가 어둡기도 하고 날씨가 꽤 쌀쌀하기도 하고 출출하기도 해서 – 저녁을 일찍 먹기도 했고 리허설 준비로 모두 정신없다 보니 스태프들이 야식을 따로 챙기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 모닥불도 피우고 고구마도 구워 먹으려고 했던 인부들의 실수라고 했다. 모닥불을 다 껐다고 생각했는데 남은 불씨가 있었고, 날이 밝으면서 바람이 거세지자 번진 것이다.


  해운은 몇 번이나 보았던 화재 기사를 다시 휴대폰으로 훑어보았다. 눈싸움을 하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대로 앉아만 있는 것도 지루하고 시간이 잘 가지 않아 보고 있긴 했지만 글자만 눈으로 훑고 있을 뿐 내용은 입력되지 않았다.


  그때, 한 스태프가 외쳤다.

  “어, 다온 씨?”


  해운은 고개를 돌렸다. 다온이 드디어 나타났다. 리허설을 진행했을 시간을 한 시간 남겨 둔 때였다. 다온의 눈 밑에 어둠이 담겨 있었다. 다온도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몸만 온 건 아니었다. 해결책도 가지고 왔다. 다온은 자신을 부르는 스태프들에게 눈으로만 인사한 뒤 해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해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공연 진행해 봐요.     



예? 무대와 의상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불탄 정원과 의상을 활용해요.     



저 폐허를요?

생태 박람회와 너무 안 어울리는데…….   


  

                                                                                불탄 자국들을 우주의 표면으로 하고 그 위에 

                                                                                별을 형상화해서 ‘우주의 정원’을 만들어 보죠. 

                                                                                우주 정원도 정원은 맞잖아요.     



별을 어떻게…….     



                                                                                                        별은 제가 만들어 볼게요.    


 

  해운이 작은 눈 속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동안, 다른 스태프들은 모두 팔까지 들며 찬성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이대로 공연이 취소된다면 그동안 일했던 대가를 못 받을지도 몰랐다. 천재지변이지만 인재이기도 했기에 뒷일은 아무도 몰랐다. 낮의 정원이라는 콘셉트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무도 불만이 없었다. 상황을 수습하는 게 더 중요했다.    


 



     



  흙 위에 점점이 뿌려진 별들 사이로 왜가리가 거닐었다. 불탄 비단 조각에 반짝이 칠을 하니 별처럼 보였다. 불타고 남은 의상 조각들을 기워서 새와 나뭇잎 의상으로 새로 만들어 입히니 지금의 무대와도 제법 어울렸다. 그슬린 자국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 상처 같기도 하고 무늬 같기도 했다. 무대 주변을 사람들이 겹으로 에워쌌다. 화재로 취소될 거라 생각했던 폐막식 공연을 진행한다는 소식에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박람회의 사흘 치 관광객들을 한 번에 모아 놓은 규모였다. 폐막식이 아니라 주말의 놀이공원을 보는 것 같았다.


  ‘가장 최근의 생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공연을 보면서 모두 탄성을 질렀다. 색색의 비단도, 나뭇잎과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왜가리도 없었지만 대신 우주가 있었다. 미래의 생태이고 미래의 정원이었다. 열흘 넘게 생각하고 만들었던 아이디어들이 한순간에 날아갔지만 훨씬 근사했다. 모두 다온 덕분이었다. 해운은 그런 다온이 사랑스러워서, 사실은 그보다 돌아와 준 게 고맙고 반가워서 다온의 눈을 쳐다보았다. 해운과 시선을 맞추며 다온이 물었다.     



                                                                                                                               예쁘죠?     



네, 예쁘네요.     



                                                                            우주의 정원이에요. 우주에서는 낮도 밤도 없고, 

                                                                            플러스성이든 마이너스성이든 다 상관없어지겠죠. 

                                                                            거기에서 나는 그냥 나예요.     



맞아요. 다온 씨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붙어 있으면 되죠.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해가 기울어 가고 어두워지면서 두 사람의 몸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두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듀엣으로 추는 춤의 한 장면인 것처럼 멀어져 갔다. 이곳이 그들의 무대였다. 무대가 된 우주의 정원에 이미 별들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하늘에는 별도 필요 없었고, 불꽃놀이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반짝이는 것들을 보고 싶다면 위가 아닌 아래를 쳐다보면 되었다. 해운은 가끔씩 옆을 보기도 했다. 다온의 큰 눈망울 속에 가장 빛나는 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온은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위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다온의 귓바퀴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모두 공연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아직 마지막 순서가 남아 있기도 했다. 흔히 행사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불꽃놀이 대신 다온이 처음에 냈던 아이디어대로, 천연 성분으로 만든 대형 비눗방울들이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형 버블 머신에서 터지는 비눗방울들이 몇 개씩 뭉쳐 불기 시작했다. 큰 비눗방울 아래에 작은 비눗방울이 붙으니 사이즈를 축소해 놓은 열기구 같았다. 투명한 미니 열기구들이 하늘을 채우며 떠다니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다온과 해운도 나란히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눗방울을 투과해서 보이는 검은 하늘이 밤바다 같았다.      



정말 예뻐요.     



  해운의 말에 다온도 똑같은 말을 되돌려 주려고 할 때였다. 하늘에 있던 비눗방울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히든 이벤트, 비눗방울 쏘기였다. 어느새 사람들이 나무로 만든 장난감용 화살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리지 않고 화살로 비눗방울들을 쏘았다. 터진 비눗방울들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거품들을 만들었다. 바닥에도 거품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거품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또는 약간 뭉클한 눈이라든지.


  정원에 거품이 얹히면서 바닥이 조금씩 미끈거리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다 치우지. 해운이 순간적으로 걱정했지만 곧 다온에게만 집중하자고 다짐했다. 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온은 이번에는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약간 벌린 채였다. 자신과 달리 한 번에 하나씩만 집중하는 다온이 대단해 보였다. 그 하나가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이었으면 했다. 나한테 좀 집중해 주지. 해운은 입을 약간 삐죽였다. 곧 생각을 바꿨다. 집중을 안 하면 집중하게 만들면 되는 거니까. 해운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입에 거품 들어가요.



                                                                                                                        엑, 맛없겠다.     



  그새 입에 거품이 들어갔는지 다온이 퉤퉤, 하는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뱉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모자라 허리를 급하게 숙이다가 중심을 잃었는지 발이 미끄러졌다. 으앗, 하는 소리를 내면서 다온이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해운도 두 팔을 내밀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지금은 둘 다 플러스성이니 안 붙을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이 나갔다. 계속해서 내리는 거품들 때문에 온몸이 미끈거렸다. 해운이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자세로 엎어지자마자 그 위로 다온이 엎어졌다. 샌드위치나 햄버거처럼 두 몸이 포개진 꼴이었다.     



                                                                   어?

                                                                   어?     



  밤인데도 두 몸이 붙은 것에 놀라 다온과 해운이 동시에 소리쳤다. 거품 때문에 녹기라도 했는지, 극성이 일시적으로 풀린 것 같았다. 다온이 조용히 속삭였다.  


   

                                                        ……무거울 텐데.

                                            그럴 리가요. 비눗방울처럼 가볍기만 한데.     



  해운도 다온처럼 속삭였다. 고개를 들어 다온의 얼굴을 보았다. 다온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얼굴을 조금만 더 앞으로 빼면 바로 닿을 것 같았다. 밤에 이렇게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온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해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운은 조심스럽게 다온의 양어깨를 잡았다. 손바닥 사이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해운의 입술이 다온의 입술로 다가갔다. 두 입술이 붙으려고 할 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해운이 앞으로 다가가기 위해 몸을 숙였지만 나아가지는 못하고 움찔거릴 뿐이었다. 


  그 순간, 두 입술 사이로 비눗방울이 떨어졌다. 해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눗방울이 두 입술 사이로 오자 비눗방울을 사이에 둔 채 해운은 다온에게 키스했다. 거품이 있으니 비로소 섞일 수 있었다. 


    

                                        아, 진짜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극성이야 정말.

                                              우리 사이도 붙고, 마음도 붙으니 좋네요.

                                                  뭐, 극성이 잠깐 풀리니 좋긴 한데…….

                                    선택할게요. 나와 다온 씨를 모두 닮은 사랑을 하는 것으로.     



  해운이 입을 떼자마자 다온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해운은 웃으면서 다온이 했던 말을 약간만 바꾸어 되돌려 주었다. 비눗방울은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만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서 계속 쏘고 있었다. 다온과 해운은 온몸에 거품들을 얹은 채 소리 내서 웃었다. 부드럽게 끈적이는 밤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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