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더니 결국 감기에 걸렸다. 병원도 가고 그냥 하루 푹 쉬고 싶어서 연차를 냈다. 평일에만 할 수 있는 몇 가지 소일거리를 처리하고, 병원을 가고 있는데 최대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우리가 결성한 사내 동아리가 마침내 승인이 났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회사에 가입할 만한 동아리가 없다는 것, 동아리의 활동과 목적이 건전하다는 것 때문에 기준에 맞춰 승인 신청만 하면 별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큰 코를 다쳤다. 내 상식으로는 잡음이 날 일도 아닌데, 일처리 방식과 몇몇 직원들의 시선에 괜히 내가 참 나대었나(?) 하는 후회마저 들 정도였다. 승인이 안 날 이유도 없었지만,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라) 일단 승인이 났다는 소식에 일단 안도가 되었다. 이 일로 피곤하게 누군가와 왈가왈부할 일 없이 이제부터는 회원들과 동아리 활동을 재밌게 하면 그만이라 다행이었다.
그러고 나서 최대리가 전해준 또 하나의 소식은 신입사원 한 명이 그만둔다는 소식이었다. 이직이 흔한 회사에서는 이런 일이 큰 이슈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이것은 비교적 큰 뉴스에 속한다. 회사를 10년째 다녔지만 동료직원이 퇴사하는 걸 보는 게 이번이 세 번째이기 때문이다. 이 세 번의 퇴사 소식은 모두 신입사원들에게서 나왔다. 특히 이번에 그만두는 직원은 바로 이전 부서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이었다. 한 팀에서 같이 일을 하진 않았지만 2년간 한 사무실에 있었다. 그 친구는 그때 회사의 계약직이었고, 일하면서 공채 시험을 준비해 우수한 성적으로 올해 입사한 직원이었다. 그래서 퇴사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회사를 입사하기 위해 그 직원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내가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1년도 안된 그가 회사를 나간다는 게 충격이었다.
그러고 나니 그 이유가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회사에 대한 신입사원의 시선은 10년째 젖어있는 나와는 또 어떻게 다른 건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최대리에게 얘기를 듣고 무작정 그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지낸 사이는 아니라 놀란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하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 나는 오늘 아파서 휴가였는데 그만둔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전화를 했다. 선배로서 해준 것도 없는데 이 참에 밥도 사주고 싶고, 무엇보다 그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고맙게도 후배가 내 제안을 수락해줘서 후배의 퇴근시간에 맞춰 내가 사무실 앞으로 가서 그 근처에서 밥을 먹었다.
지금까지 그만뒀던 두 명의 직원들은 다 갈 곳을 정해놓고 퇴사했기 때문에 나는 이 친구도 그런 줄 알고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회사 들어오면서 접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하거나 다른 기관에 입사하는 것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정해진 것 없이 나가는 그의 용기가 부러우면서도 한 편 얼마나 버티기가 힘들었으면 두려운 마음을 머금고 나갈 생각부터 했을까 안쓰럽기도 했다. 실제로 후배는 본인의 나이와 척박하고 어려운 현 취업환경을 고려하면 솔직히 지금 이 결정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자기에게 맞는 성장을 그려볼 수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워낙 똑 부러진 친구기도 했지만, (내 예상보다 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현명함이 있었고 자기 선택과 결정에 대한 강단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를 관두는 거라 해도 여러모로 조심스러웠는지 퇴사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주저하길래 내가 먼저 내 현재 상황과 회사에 대한 생각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후배가 보기에 내가 회사에 잘 적응해서 다니는 거처럼 보였는지 대리님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그러고 나서 들은 후배의 퇴사 이유는 나도 정말 잘 알고 너무 느끼고 있는 것들뿐이었다. 신입 때 내가 느꼈던 것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후배 말을 듣고 나니 (적어도) 내가 다니는 10년 동안 이 회사가 진짜 바뀐 게 없구나라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그리고 그 회사를 다니는 나 역시 타의로 홀리고 자의로 젖어서 무려 10년을 그저 그렇게 지내왔다. 별생각 없이 지낸 것 반, 점점 나아질 거라는 나이브한 기대 반으로 10년을 보내고 나서야 깨우친 나와 달리 후배는 엄청 빨리 이곳을 감지하고 행동까지 옮기고 있었다.
나 역시 이 곳에서 찾기를 포기한 적성과 성장.
후배가 여기를 나가면
반드시 그것들을 꼭 찾고 보란 듯이 성취했으면 좋겠다.
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오는 길에 신입직원이 나에게 오늘 대리님 덕에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안 물어봤지만, 아마도 겉으로는 멀쩡히 다니는 것같이 보이는 선배 안의 곪아 터진 생각들이 본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고 자기 선택에 확신이 생긴 것 같았다.
어디 가나 다 똑같아, 별거 있는 줄 알아.
밖이 얼마나 추운지 모르고 미쳤구나. 쯧쯧 나도 언젠가 들어본 적 있었던 이런 말들이 갑자기 귀에서 들리는 듯하다.
조직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 조직에 어떤 '체계'를 기대하는 것이 이토록 어렵고 대단한 바람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없을 때 이토록 괴로울 일인지 그 친구도 9년 전의 나도 몰랐을 것이다.
후배가 앞으로 다른 곳에서 조직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면 (우리 둘 다 경험하지 못한) 잘 갖춰진 조직의 체계를 꼭 접해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