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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서정 Jun 26. 2024

6.30.



며칠사이 반대쪽 손끝도 검게 변해버렸다. 쉬는 날이라 오전에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등산 일정이 잡혔다. 죽을 병 아니면 참가하라는 농담 섞인 문자에 욕지거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자기가 심심하면 토요일 일요일 가릴 것 없이 직원들을 호출하는 부장의 버릇은 모든 직원들이 질색했다. 손도 신경 쓰이고 몸도 피곤해서 쉬려고 했던 계획은 결국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아침 7시에 산 입구에 모인 직원들은 모두 잠이 덜 깨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전날 회식으로 3차, 4차까지 달린 사람도 있다고 했다. 흐뭇한 얼굴로 직원들을 쭉 훑어본 부장이 가장 앞서서 산에 올랐다. 나는 맨 뒤에서 일행들을 쫓아갔다.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구토가 나올 것 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장을 따라갔다. 그러다가 산 중턱쯤 가서는 음료를 마시느니 오이를 먹느니 하며 아예 자리를 펴고 30분이 넘게 떠들었다.


자연스럽게 여기서 파장인가 했는데 부장이 복병이었다. 그는 끝까지 정상에 가야겠다고 우겼다. 딸랑거리기 좋아하는 몇몇이 나서서 부장을 따라가기로 했다. 나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부장과 추종자들이 자리를 뜨자 나머지 직원들은 그대로 하산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기에 하산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산하는 직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이 부장에 대한 뒷말이었다. 모두들 ‘일이나 제대로 하지 왜 휴일에 자꾸 불러내는지 짜증이 난다.’는 말을 부드럽고 길게 말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다른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다 공범이 되어 비밀로 하자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서 집에 왔다. 현관문을 닫고 시간부터 확인했다. 오후 2시 32분. 병원에 가기는 늦은 시간이었다. 다섯 평이 채 안 되는 원룸 자취방은 고요했다. 밑에만 조금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쏟아버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차가운 나무 무늬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눈이 스르륵 감겼다.


온 몸이 달콤한 잠에 물들어갈 때쯤, 난데없이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물방울처럼 매끄러운 소리가 짜증스럽게 고막에 얽혀들었다. 누구 전화지. 회사일지도 모르는데. 몸이 바닥에 반쯤 잠긴 것 같아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벨소리가 멈췄다. 꿈틀대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 벨소리가 우레처럼 귓속을 후벼 파는 느낌에 퍼뜩 잠에서 깼다. 밖은 아직 밝았다. 3시 14분. 발신자는 엄마였다.


“어. 엄마. 흠흠.”


얼마 자지도 못했는데 잠겨버린 목소리가 나지막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도 내 눈치를 보는지 상냥한 목소리였다.


“잤나?”

“응. 아침에 등산 갔다 왔어.”

“뭐한다고 등산을 갔다 왔노. 잠이나 자지.”

“부장이 불러서.”


엄마는 말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통화인데도 나는 늘 불편했다. 나는 엄마에게 늘 불쌍한 딸이었고 엄마는 내게 끊어낼 수 없는 부담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마이 힘드나?”

“……그만 둘 수만 있으면 그만두고 싶어.”

“에휴……. 조금만 더 참으면 그래도 좀 나을 끼다. 아직 들어간 지 1년밖에 안 됐잖아.”

“알겠어.”


늘 똑같은 대화였지만 엄마가 이 말만 하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입사 3개월 차에도, 6개월 차에도, 1년 차에도 엄마는 늘 ‘아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언제나 ‘알겠어.’였다.


엄마는 혀를 쯧쯧 차더니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내내 쏟아지던 잠 대신 눈물이 쏟아졌다. 코가 찡해서 온 얼굴이 다 아팠다. 회사가 아니라 집이라서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적어도 이 좁은 공간은 온전히 내 거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 너머에서 재수 없게 울지 말라는 누군가의 윽박질이 칼같이 날아들었다. 나는 잘 벼린 칼날에 성대를 베인 것처럼 다시 숨을 죽였다. 이 도시 어디에도 나를 위한 공간은 없었다.


끅끅대며 우는 동안 손과 발이 끊어지듯 아팠다. 아픔은 관절을 타고 손목과 발목까지 올라왔다. 심상치 않은 통증에 겁이 덜컥 나서 울다 말고 눈을 번쩍 떴다. 새카맣게 변했던 손끝 위로 손 전체가 진한 갈색으로 변해있었다. 얼른 양말을 벗고 발 아래쪽을 보았다. 발바닥부터 복숭아뼈 있는 데까지 전부 검게 변해있었다. 지난번 까맣게 변했던 손끝처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심장이 쿵쾅쿵쾅 널뛰었다.


이제 손발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봐도 충격적인 모습이라 응급실에 가야하나 고민이 됐다. 조심스럽게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진한 갈색의 손가락으로 시커먼 발을 누르는 것이 낯설어서 잠깐 망설였지만 막상 손이 발에 닿았을 때의 감촉은 평소와 똑같았다. 뭉툭하게 찔러오는 손가락의 느낌과 매끈한 발바닥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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