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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Jan 14. 2022

마당에서


  햇살 가득한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다. 지인이 새로 주인이 된 농가이다. 그녀는 집을 원한 것이 아니다. 본가로 드는 길이 좁아 넓힐 요량이다. 무너진 사랑채와 토담에서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담장에 부딪힐까 아슬아슬하게 드나들던 좁은 길이 훤하게 뚫리는 날, 마당은 흔적 없이 사라질 운명이다. 

  나의 마음은 수시로 농가로 달려가 마당을 서성인다. 한때는 가을걷이로 마당 가득 곡식이 넘쳐났고, 어둑해질 무렵까지 아이들 소리가 끊이질 않았으리라. 그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품은 채 곧 사라질 마당의 처지가 안타깝다. 불현듯 기억 저편에 자리한 마당 깊은 집이 떠오른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대문은 마당보다 높다. 이름만 대문일 뿐 사철 문이 열려있는 집이다. 번화한 도시에 요행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 좁은 골목길을 오르면 푹 꺼진 마당이 한눈에 보인다. 대문보다 지대가 낮은 곳에 집을 지은 탓이다. 안채와 작은 사랑채에 아홉 식구가 북적거리던 곳, 애증이 넘치던 그곳을 나는 마당 깊은 집이라 부른다.

  마당 깊은 집으로 향하던 첫날이 눈에 선하다. 평소 즐겨 입지 않던 불편한 옷차림처럼 어색한 자리이다. 직장 상사인 아버님은 반가웠으나 어머님은 처음이라 조심스럽다. 전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들에게 물어 차리셨다는 밥상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득하다. 당신만의 방법으로 나를 반겨주신 것이다. 마당 깊은 집은 그날의 어색함도 설렘도 소리 없이 품고 있다. 

  마당 깊은 집, 텃밭 모퉁이 자리는 어머님의 특별한 공간이다. 아니 우리도 종종 그곳을 이용한다. 당신이 보이지 않아 집안을 둘러보면 텃밭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열중하는 모습이다. 당신은 땅을 파낸 둥그런 웅덩이에 온갖 것을 넣고 불을 피우고 있다. 가끔은 아버님이 사주신 밍크도 며느리가 아끼는 재킷도 당신의 불쏘시개로 쓰인다. 어둡고 메케한 연기가 마당에 자욱하다. 

  도무지 당신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마음에 상처가 깊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이지만, 느닷없는 당신의 말과 행동이 나를 공격한다. 어머님은 어린 남매를 데리고 시아버님과 재혼하셨다. 세 살 된 막내에 그 위로 네 명의 전실 자식이 있으니 어린 자식 일곱을 키우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버님의 성실함과 어머님의 알뜰함으로 칠 남매는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살림에 여유가 생기고 화목해지자 가까운 이들은 왜곡된 시선으로 분란을 일으킨다. 오해는 마음으로 낳은 자식을 돌아앉게 했고, 당신의 지친 마음마저 무너뜨렸다.

  당신의 삶은 뒤로 한 체 자식을 지키고자 모든 짐을 짊어졌으리라.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을 바로잡고자 자신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으리라. 하지만 누굴 탓하랴. 자식은 부모의 눈빛에 몸달아하고 부모의 사랑을 받고자 해바라기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덧없는 사랑과 미움은 빗나간 서운함으로 가슴에 메우지 못할 깊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머님은 이유 없이 역정을 내는 일이 잦아진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앓아눕는 당신을 대학병원에 모신 참이다. 밝아지던 모습도 잠시 다시 역정을 낸다. 아무렇지도 않은 당신을 환자랍시고 병원에 입원 시켜 모욕을 겪게 한단다. 어쩌랴. 박사님께 인사드리고 퇴원하자며 진정부터 시킨다. 마침 처방 없이 먹던 약들이 걱정스러워 성분을 의뢰한 결과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은 참이다. 의사는 약은 이미 어머님께 친구와 같다며 갑자기 끊지는 못할 것이라며 조금씩 줄여가자고 말한다. 오죽하면 약을 친구로 삼았을까.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 당신은 다시 아기처럼 평온한 모습이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부아가 불같이 일어난단다. 그럴 때면 옆에 있는 며느리에게 불똥이 튄다며 내 손을 꼭 잡는다. 바로 처음 만나던 그날의 따뜻했던 손길이다.

  마음결에 불길이 솟아 텃밭 웅덩이로 달려갔을 당신의 마음을 이제야 가늠한다. 아버님이 사준 모피가 무슨 소용이랴, 자식도 며느리도 당신 편이 아닌 듯 서운했으리라. ‘계모’라는 주위에 수군거림도 어머님의 마음을 더욱 움츠러들게 했으리라. 당신의 속을 보여줄 수 없으니 덧난 상처를 감추고자 마음속 깊은 웅덩이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가슴에 화가 솟으면 습관처럼 가슴에 일어난 불보다 웅덩이에 더 큰불을 지핀 것이다. 아마도 당신의 삶이 짙은 연기로 내려앉을 때 온갖 시름도 녹아내리길 간절히 원했으리라. 

  깊이 파인 마당은 당신의 침묵이자 삶의 증거이다. 마당은 애증으로 가득한 당신의 삶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당신에게 마당 깊은 집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고통을 삭이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순간 웅덩이에 스러지지 않은 불꽃이 당신의 대답인 양 일렁이는 듯하다. 그 불꽃이 내 가슴에도 일렁이는가. 잊고 지냈던 마당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당신의 말 없는 행위에 놀란 내 가슴만 쓸어내릴 줄 알았지, 애달픈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줄을 몰랐다.

  농가의 마당을 바라보며 이제야 당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내 가슴은 마른 먼지만 휘날리는 마당이었던가 보다. 그러니 그 무엇도 온전히 품지 못한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니 농가에 저녁노을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오늘 같은 날 당신과 마당에 멍석 깔고 앉아 오래도록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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