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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 이인숙 Mar 09. 2022

장비타령


  채소를 다듬어 놓은 김장거리가 수북하다. 찹쌀풀도 쑤어 식힌다. 고춧가루는 채소 육수에 불려 놓고 무채를 썰고 있던 참이다. 칼날이 무뎌 무가 칼을 써는 것인지 칼이 무를 써는 것인지 죄 없는 손가락만 곤욕을 치른다. 검지 아래쪽 피부가 빨갛다.

  칼을 아쉬운 대로 숫돌에 갈아 본다. 하지만, 말이 칼을 가는 것이지 실상은 칼 가는 법을 모르니 칼날의 상태는 변화가 없다. 무 몇 개를 썬 것뿐인데 손가락은 물집이 반점처럼 잡힌다. 때마침 문자를 주고받던 선생님께 투정을 부리듯 이야기하니 ‘샘, 장비 타령은 아니죠.’란 답글에 한바탕 웃는다. 허를 찌르는 말이지 않은가. 칼이 무딘 걸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다. 미리 칼을 갈든가 새 칼을 장만했어야 했다. 장비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무뎌진 칼날만 탓했으니 장비 타령이 아니고 무엇이랴. 

  배추를 절이는 과정이 작은 아파트 공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여 절인 배추로 준비한다. 하루 전 시장에 들러 사 온 싱싱한 갓과 골파, 무를 채 썰어 양념과 적당한 비율로 섞어 김장 속을 만든다. 큰딸은 시작도 전에 절인 배춧잎에 속을 싸 맛을 본다. 녀석은 이 맛에 김장을 함께한다며 너스레를 떤다. 새벽부터 시작한 김장은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후에야 끝이 났다. 무딘 칼날로 무채를 써느라 손가락에 상처는 남았지만, 김치가 가득 담긴 통들을 보니 뿌듯하다. 이것으로 겨울 김장은 완벽하다. 마지막 배추포기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넉넉히 넣은 겉절이와 푹 삶은 수육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뒷정리하고 쉬려다 딸과 함께 데이트하고자 집을 나선다.

  찻집 창가 너머 숲속은 안개가 자욱하다. 금방이라도 신선이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나타날 것만 같다. 얼마 전 지인과 다녀간 산골 책방 분위기가 좋아 녀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책을 보며 따뜻한 차를 마시고 평온한 시골 풍경에 머물 수 있는 작은 서점이다. 책방을 돌아본 녀석이 슬쩍 책 한 권을 내민다. 겉표지에 크고 작은 직사각형 도형이 그려진《따로, 또 같이 살고 있습니다.》란 제목에 내용은 다소 건조할 것만 같은 책이다. 작가의 약력을 보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십여 년을 넘게 근무한 관리소장이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첫 느낌과는 달리 내용에 빠져든다. 그러다 문득 사람도 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장비란 생각에 이른다.

  인간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없어선 아니 될 구성원이다. 아니 더없이 중요한 인적 장비이다. 나의 직장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이다. 회계 업무를 담당하지만. 일은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민원의 종류에 따라 적절하고 친절히 응대해야 한다. 어느 날은 감정이 격해진 민원인을 응대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한다.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많은 수강생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한 업무이다. 

  주민과 하루도 마주하지 않은 날이 없다. 가끔은 입주민에게 멱살을 잡히는 남자직원도 있다. 불만을 토로하다 격해진 감정이 폭발한 탓이다. 관리사무소는 입주민의 생활을 돕고자 존재한다지만, 모두를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파트 단지의 작은 평화도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배려와 인내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그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관리소 직원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정신이 없다. ‘산과 나무에 내려앉은 눈은 정말 멋지지만, 아파트 바닥에 내린 눈은 웬수입니다.’란 작가의 글이 모든 상황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아파트 입구에 염화칼슘도 뿌려야 하고 자동차가 밟아 들인 눈으로 물바다가 된 주차장은 서둘러 닦아야 한다. 눈이 왔다고 즐거워할 여유가 없다. 행여 눈싸움하던 아이나 연로한 주민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온 정신이 눈 쌓인 단지 곳곳을 살피느라 소복이 내려앉은 눈을 즐길 여유가 없다. 

  아나운서가 드디어 첫눈이 내릴 거라며 들뜬 목소리이다. 하지만, 내 처지에선 마음이 들뜨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날씨 예보를 듣는 순간, 나만이 아닌 전국의 아파트 관리소 직원은 긴장하리라. 우리 아파트에서는 다행히 동절기 장비들을 미리 준비해둔 참이다. 당직자는 이 시간 적당한 위치에 염화칼슘과 장비를 비치하느라 몸과 마음이 부산할 터이다. 결코, 첫눈이 즐겁지만은 않을 동료에게 마음으로 응원을 보낸다.

  또 다른 동료에겐 책의 본문 몇 장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전송한다. 며칠 전 좋지 않은 일로 시름에 젖은 동료이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은가 봐요. 서점에서 이런 글을 발견했어요.’란 문자도 곁들인다. 하지만, 매번 곤혹스러운 민원만 받는 것은 아니다. 직접 만든 반찬도 가져오고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 왔다며 간식거리를 두고 가는 마음 따뜻한 분이 더 많다.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직장이지만, 주민을 친절히 맞이하고 응대할 수 있는 마음의 장비 또한, 그들에게서 얻는다.

  손가락에 부풀어 오른 물집을 살핀다. 장비를 제대로 준비 못 하여 생긴 상처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겨우내 먹을 양식을 만반으로 준비하였으니 헛된 상처는 아니다. 덕분에 바빠서 자주 볼 수 없는 딸의 얼굴도 덤으로 보았으니 좋다. 녀석이 고른 책 한 권을 계산하고 기분 좋게 산골 책방을 나선다. 내일은 출근길에 먹음직스러운 겉절이를 좀 챙겨야겠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관리소에 내리는 눈은 왠수’라고 외친 관리소장이 쓴 책 이야기도 들려주리라. 물론, 예상치 못한 민원에도 당황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장비도 단단히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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