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혁의 생각
징비록
‘징비록’에서 징비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다.’라는 뜻으로, 조선 중기 문신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 기록한 회고록이다.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해 알아보면,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명나라를 공격하고 싶었다. 먼저 그 관문인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고 상인 등을 가장해 염탐꾼을 보내는 등의 스파이 활동을 통해 조선을 정확히 파악하려 했다.
그 당시 조선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웠고, 양반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너무 많은 노비를 고용해 당시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다고 한다. 또한, 100년간 지속된 평화로 인해 제대로 된 군사력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일본은 조선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했고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길을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심각성을 느낀 류성룡은 선조에게 통신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서인 황윤길, 동인 김성일을 주축으로 한 통신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일본은 7개월 동안 통신사를 만나주지 않았고, 겨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지만 무시를 당하고 돌아온다. 선조는 통신사에게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인가에 대해 물었고 여기서 의견이 갈리는데, 서인은 일본이 반드시 쳐들어올 것이니 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은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니 괜히 준비해봤자 세금과 노동력으로 결국 피해 보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이길 수 없었던 3가지
결국 선조는 일본을 무시했고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된다. 동래(현 부산)를 시작으로 계속 조선군은 참패했고 임금은 도망가기 바빴다. 일본은 승리를 확신하였지만 일본이 간과한 3가지가 있었다.
먼저 군량미 보급을 막지 못하고 한양만을 점령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당연히 임금을 인질로 잡기 위해 한양으로 갔지만 선조는 이미 도망친 후였고 일본은 전의를 상실했다. 왜냐하면 일본의 성주는 본래 자신의 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한양을 점령하면 전쟁에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순신 장군의 존재이다. 이순신은 남해 일대를 지배하여 일본의 해상 보급로를 끊고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혔다.
마지막 세 번째는 조선의 의병이다. 승려를 비롯한 의병들이 전쟁에 가담하였고, 정규전이 아닌 게릴라전을 통해 육상 보급로를 끊는 등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했고, 겨울이 되자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왜군은 조선군과 명나라 연합군에 참패하고 휴전협정에 돌입한다. 하지만 일본의 무리한 요구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된다. 다시 전쟁에 돌입해야 했지만 이 당시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내려 옥살이 중이었다. 이순신 없는 해상은 일본의 놀이터였고 조선이 참패하자 신하들의 제안으로 감옥에서 나와 권율 휘하의 백의종군 끝에 복귀하여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일본은 전쟁을 끝내고 퇴각하려 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지금 보내면 언젠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이니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끝내 전사하였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징비록은 사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상황이 더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류성룡이 회고한 임진왜란 당시의 내용에 많은 감명을 받았고 이에 집중하여 책을 읽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우리를 알았지만 우리는 일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전쟁 초반은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여러 장군들 그리고 의병의 활약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200년간 지속된 평화로 인해 온 백성들은 평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방심이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만들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말이 있듯이 군사력이 곧 미래 안보의 핵심 요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