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대원 Oct 02. 2019

♡ 아빠 빵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

첫째 딸 지우는 9살이다.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리조트에 갔을 때의 일이다. 늦게까지 놀다가 씻지도 않고 잠들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목욕하고 나오라고 했다. 지우는 아빠랑 같이 하자며 떼를 쓴다. 몇 번을 혼자하라고 얘기했지만 막무가내다. 딸의 투정 앞에 그리 단호한 아빠는 아닌지라 못이긴 척 같이 욕실로 들어갔다.

이젠 스스로 잘하기 때문에 직접 씻겨주거나 하지도 않을 뿐더러 막상 옆에 있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 역할도 없다. 샤위기쪽과 세면대쪽 사이에 유리벽이 세워져있어서 지우가 씻는 동안 나는 세면대쪽에서 서서 기다리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한참을 샤워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습기가 차서 유리벽이 하얗게 되었다.


지우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자기가 읽는 방향이 아니라 내가 읽는 방향으로 쓰는 건 좋았는데.. “ㅓㅇ”를 먼저쓰고 “ㅓㅃ”를 적어서 내가 보기엔 “빠아”로 보였다. 

“우와~ 지우가 아빠가 읽을 수 있게 글 써준거야? 근데 지금은 ‘빠아’라고 보이는데?”라고 말했더니 다시 그 옆에 또박또박 생각하며 글씨를 적었다. 

“ㅓㅃㅓㅇ ♡”라고. 

내 눈에는 아까 적은 글씨까지 더해져서 “♡ 아빠 빠아”로 보였다. 

“우와~ 지우 이번엔 잘 적었네!”

그렇게 칭찬해 주면서 “빠아” ㅇ과 점하나를 더해서 “빵야”로 만들어 주었다. 

“♡ 아빠 빵야”

“이렇게 하면 되겠다. 그치?”


아기 같았던 딸이 어느덧 초등학생이 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글자를 쓰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는 지우만큼 타인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있는가?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고 있는 건 아닌가? 비록 내 눈에는 거꾸로 보일지라도 상대방이 읽을 수 있도록 써주었던 지우에게 또 한 번 배운 날이었다.

욕실에 들어갈 때 툴툴거리며 짜증을 냈지만, 나올 때는 밝은 미소로 지우를 바라보며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꼭꼭 눌러 물기 없이 잘 닦아주었다. 딸아이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따뜻한 아빠”의 모습이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_맞은 편 길을 걷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