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없어졌다고 필요 없는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도 오전엔 흐리다가 수업을 마치고 나니 햇살이 내리 쬡니다.
함께 수업을 들으시는 수강생 중 몇 분이 날씨가 좋아질 때마다 신기해 해주시니 저도 모르게 뭔가 더 믿게 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제가 들고간 장우산은 필요없어졌고, 가는 길 오늘 길에 짐만 되었습니다.
장우산을 한쪽 팔에 끼고 내리 쬐는 햇살을 가로지르며 한 손으로는 못 다 읽은 책을 들고 걸어갑니다.
이쯤되니 좀 많이 귀찮아집니다. 그냥 가져오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스쳐갑니다.
그러나 아마 다시 같은 상황이더라도 저는 우산을 챙길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필요없어졌다고 해서 처음부터 필요없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일기예보대로 비가 왔다면, 저는 가져온 우산을 잘 썼을 테고, 불필요한 후회를 하거나 난처해 하며 비가 그치길 기약없이 기다리거나, 늦기 전에 필요도 없는 우산을 구입해서 쓰고 돌아왔어야 했을테니까 말이죠.
돌아보면 인생도 비슷합니다.
그 당시엔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했던 일들이 막상 지나고 보면 쓸모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대학생 때 병역특례를 가기 위해 경영학과였음에도 정보처리기사 자격증을 딴 적이있습니다. 군대에서 보내는 2년이 아깝기도 했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5년째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어서였습니다. 한달 정도 시험에 나올 만한 코드를 거의 다 암기하다시피해서 2번만에 합격했었는데요. 그 당시 여자친구가 여군으로 입대하는 바람에 제가 딱히 병역특례를 가야할 이유가 사라졌고, 저 역시 망설임없이 현역으로 입대한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나와서 한번도 써먹어 본적 없었으니 맑은 날 장우산을 들고 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 덕분에 저는 나는 컴퓨터를 제법 잘 다루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자신감이 훨씬 더 많은 일을 도전하는데 자유로운 태도를 가지게 해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합니다.
몇 년 전부터 몇 백편의 짧고 긴 글들을 틈틈이 써왔고, 지금도 매일 쓰고 있습니다만, 제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시점은 이미 책이 나온 후였고, 그 이후에 아직 추가로 출간된 책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책이 안나왔으니 나의 글은 의미가 없는거냐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몰랐던 더 많은 나를 발견했고,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분명 여러 권의 책을 더 내겠지만, 제가 쓰고 있는 글 모두가 책으로 나올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칸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의 본성에 대해 겸손한 사람은 우리가 뒤틀린 목재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어떤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 봐도 저마다의 삶은 다 뒤틀린 목재 같습니다. 어디 하나 곧은 곳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삶을 돌아보면 결과적으로 불필요해 보이는 일이 참 많이 보이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런 뒤틀린 모양이 내 삶의 무늬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벌어지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책 한권 읽는다고, 글 한편 쓴다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해서 바로 커다란 행운이 돌아오진 않을 테고요. 오늘 내가 땀흘려 노력한 것이 바로 결실을 맺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서 큰 파동이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할 때 결과적으로 보면 내 한표는 있든없든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그런 모든 표가 모여서 한 나라의 역사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분명 나의 삶의 어떤 순간들은 맑은 날의 장우산처럼 불필요해 보일 겁니다. 어쩌면 그런 시간들이 더 많아 내 인생 대부분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사소한 순간도 다 한번 뿐인 소중한 "내 인생"입니다.
어제 가져간 장우산은 비록 한번도 펼치지 않았지만, 덕분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글을 쓰고 있네요.
이 글은 또 어떤 파동을 불러 일으킬까요? 오늘은 어떤 새로운 일이 내 삶에 찾아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