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존재의 기술

우리는 아직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by 변대원

올해 둘째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작년에 첫째 때는 처음이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확실히 둘째는 뭔가 보이는 게 있다.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내고, 시간표를 보내고, 녹색어머니회의 일원으로 아이들의 아침 등교길에 도우미를 할 수 있는 일정을 보내달라는 안내장도 보낸다.

내가 다닐 때는 몰랐는데,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닌다는 평범한 일상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서 만든 결과물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아이는 학교에서 무엇을 배울까? 이게 늘 궁금하다.

종종 오늘은 뭐 배웠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때론 물어보지 않아도 "아빠! 아빠!"하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커가는구나 싶다가 문득 이렇게 같은 교육과정 속에서 아이들의 생각이, 경험이, 상식이 규정되어가겠구나 싶었다.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알려주는 않는 한가지 질문이 남아있다.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구나.

자기 삶의 존재와 그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해 보지 않은 사람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그런 관계 속에서 암묵적으로 사회가 정해준 "막연한 정체"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막연한 존재를 사랑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존재의 기술>에서 우리가 존재하기 위한 기술을 알려주려 했다. 그는 "자신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정립하라"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을 살지 못한 채, 그저 누군가가 규정해 둔 방식, 사회적 통념, 그들의 눈치만 보고 살아간다. 그런 것이 형성되는 시기가 초중고 시절이 아닐까?

물론 대부분 아닌 척 살아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사회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수많은 역할의 페르소나를 걷어내고 자신의 맨얼굴을 잠시라도 마주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고민해보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질문하지 않는 우리에게 <존재의 기술>은 내 삶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만의 확신을 정립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스스로 정하라는 것이다. 시험을 쳐서 그 결과로 알게 된 00 점의 나를 걷어내고, 00대학 출신인 나를 걷어내고, 직장과 직함을 걷어내고, 그저 삶을 살아가는 본연의 나를 발견하고 스스로 정하라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고, 언제 가장 행복한가?


가끔은 삶의 본질적 질문과 마주해야하는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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