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마음의 속사정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게 막는 울타리 걷어내기

by 변대원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은 인간이 가진 자유의 상징이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만약 스스로 자유롭지 않다고 느낀다면, 지금 나를 만든 선택이 누구의 선택이었는지 살펴보면 된다. 막연하게 내 인생이니 내가 선택한 것 같지만,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스스로 뭐든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로 2가지 경우로 나뉜다. 먼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실패했을 때, 주위에서 비난을 받았거나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두 번째는 책임지기 싫어서 선택을 회피하는 경우다. 대체로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 사람이 책임을 지기 때문에 하다못해 점심메뉴조차도 남들에게 미룬다. 언뜻 동기는 달라 보이지만 사실 첫번째 경우와 그 뿌리는 같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때 의외의 편리함이 있다.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책임질 필요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단순한 편리함에 길들여진다. 이 편리함이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그러다 이미 누군가의 경험을 따라가기에 급급해진다. 단순한 메뉴선택 뿐만이 아니다. 여행계획도, 자녀교육도, 심지어 자신의 진로와 취업에 대한 의사결정도 타인의 경험에 의지한다. 나와 남의 상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를 텐데 이상하게도 타인의 경험이 정답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도대체 어디에 그 뿌리가 있는 것일까? 나는 그 뿌리에 가정교육이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학습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가 더 나은 대안을 대신 고민하고 선택해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부모가 아이에게 더 좋은 제안을 할 수는 있겠으나, 결국 선택은 아이의 몫이다. 그건 7살이나 18살이나 30살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당장 눈앞의 작은 상황들 하나하나에 포커스를 맞추어 그것에 더 좋은 대안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려는 부모가 오히려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셈이다.


둘째 아이가 6살 때 처음으로 스스로 목욕을 했다. 물론 머리에는 샴푸가 잔뜩 남아있었고, 몸에도 바디클린저가 미끌거리는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뭐라고 했다. "이게 뭐야~" 그랬더니 둘째는 스스로 목욕하지 않으려고 했다. 순간 아차 싶었다. 며칠 뒤 다시 기회가 왔다. 스스로 목욕하는 사람은 어린이고, 엄마 아빠가 씻겨주는 사람은 아기라고 이야기했거니 다시 자기가 혼자 씻는단다.

여전히 아이의 목욕은 엉망이었다. 이번에는 잔소리 대신 칭찬과 함께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석우야, 이제 스스로 목욕도 하고 정말 멋지네. 우리 석우 이제 어린이구나? 그런데 아빠가 보니까 아직 머리에 샴푸가 남은 것 같아. 이건 샤워기를 이렇게 해서...”


그냥 내가 씻겨주는 게 몇 배는 간편하지만, 그렇게 언제까지 씻겨주나 싶어서 귀찮아도 하나하나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내 역시 생각한 바가 있었는지 귀찮음을 감수하고 아이들이 스스로 목욕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이젠 혼자서도 아주 잘 씻게 되었다. (물론 씻으러 들어가기까지 또 많은 실랑이가 필요하긴 했다.)


당장 하루하루의 아이의 목욕상태만 놓고 보자면 부모가 해주는 게 당연히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부모가 씻겨주면 아이는 스스로 목욕하는 법을 언제까지고 배우지 못할 것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너는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까지도 엄마가 목욕을 시켜줘야 하는 거야?”


과연 스스로 목욕하지 않는 것이 정말 아이의 잘못일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분명 스스로 하고 싶었던 경우도 있었을 텐데 엄마가 본인 마음에 들지 않아 아이가 시행착오 하는 과정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들이 반복되면 아이는 자기가 스스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판단해버리지 않을까? 그래서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진 않을까?


이미 성인이 된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선택과 책임은 모든 사람이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모든 선택이 완벽할 수 없다. 그런 인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 더 완벽하고 싶어서 실패를 선택하기 보다는 망설이거나 타인에게 선택을 미루는 행동을 하고 만다.


세세한 것까지 다 능동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선택하라는 것이다.


기억나진 않겠지만, 분명 나 역시 어린 시절 실패를 통해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나거나, 친구들 앞에서 부끄럼을 당한 부정적 감정들이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막고 있을지 모른다. 이젠 스스로 그 울타리를 걷어야 한다.


선택은 권리다. 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예컨대 부모님의 말을 따르는 것도 선택이다. 부모의 만족이 내 인생의 모든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물론 부모님의 조언에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분명 연륜의 힘이 있다. 그러나 최종결정은 내가 하는 거다. 부모님의 조언대로 하더라도 부모님의 의견에 따른 게 아니라, 내가 결정한 거다.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그건 부모님의 잘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 잘못이다.

스스로 정하고 책임지는 삶이 멋진 삶이다. 내가 직접 정한 것이라야 기꺼이 책임질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스스로 정하지 않고 그 순간 타인에게 그 선택권을 미루어 버린 사람은 끊임없이 타인을 원망하며 산다. 도대체 그 원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 원망을 통해 더 나아지는 것이 무엇인가?

내 인생의 책임은 기꺼이 내가 진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매사에 남 탓을 한다. 내 잘못이 아니니까 스스로 개선하지 못한다. 개선하지 못하기에 성장도 하지 못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신, 세계, 선조들, 운명, 사회에 책임을 돌리지 않으려는 욕구는 바로 그 자기원인이 되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중에서


누구나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는 태도에 있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결국 더 나은 인생은 좋은 태도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선택이 좋기만 한 인생은 매 순간에는 최선일 수 있지만 그 인생의 합은 오히려 최악일 수 있다. 누구나 때때로 넘어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스스로 기꺼이 그 선택에 책임지고 그 실수로 부터 교훈을 얻으며 나아 갈때만 성장할 수 있다. 매 순간 모든 선택이 다 좋을 순 없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생의 합은 최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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