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기도 길기도 했던 6일, 144시간, 8,640분.
전화로 외래진료를 오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외래진료를 통해
‘암 입니다.’ 들은 날로부터
6일 후,
수술을 받을 수 있었어요.
돌이켜보니 짧은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참 길었던,
평안했다 불안했다,
눈물이 나오려다 멈추려다,
그러면서도 3.5인분의 일상을
감당해야 했던 그 때의 이야기에요.
전화를 받은 그 날,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카페에 가입해서
여러 글을 보았어요.
소위 ‘명의’라고 하는 의사선생님들,
소위 ‘빅5’라고 하는 병원들.
고민이 되었어요.
대학병원 중에서도 더 큰 병원,
매스컴에 나오는 의사선생님을
만나보고 결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번 카페에 들어가서
글들을 검색하고 읽고 메모했어요.
이 고민은 외래진료 받기 전부터
수술실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계속되었어요.
사람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문득,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했어요.
급한 것도 무엇인지 생각해봤어요.
전원한다면, 다시 검사를 받아야 하고,
검사 예약도, 외래 예약도
만만치 않은데,
이 시간동안 아주 만약에
병세가 악화되면 무슨 소용일까?
겨울 지나고 봄 되어서 수술을 받는다 해도,
여전히 아이들은 어리고,
보호자인 내가 왔다갔다 해야 하는데,
아이들 돌보고 일도 하면서
먼 병원까지 왔다갔다 하는 일이 가능할까?
빨리 받을 수 있다면, 빨리
수술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증상이 있기 전,
건강검진을 통해 발견된 암이니,
전이가 되기 전일 가능성이 높은데,
큰 병원 가려다가
전이가 되는 상황이 온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결정을 유지했어요.
100%의 확신으로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매일 매순간 흔들렸지만,
유지하는 것에 무게가 실렸던 것이었어요.
수술 날짜가 잡히고,
감사하게도 시이모님께서도
도와주러 오셨어요.
어머님과 이모님 덕분에,
수술 전날에는
혼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어요.
돌아보니,
‘너도 좀 울고 와라.’는
마음이셨던 것 같아요.
눈에는 눈물이 가득차 있는데,
남편이나 어머님 앞에서
내색도 못하고,
아이들도 돌봐야 하고,
의뢰인들과 동료들과 일도 해야 하니
꾹꾹 누를 수밖에 없었던 눈물을
보셨던 것 같아요.
수술 전 날,
교회에 갔어요.
혼자 예배를 드린 건 오랜만이었어요.
첫째를 출산한 이후에는
자모실에서 아이와 함께 예배를 드렸었거든요.
혼자 예배를 드리니, 눈물이 터졌어요.
그래도 다행히 예배 중이어서,
찬양 중이어서,
설교가 감동적이었기에
편하게 울 수 있었어요.
예배가 끝났어요.
눈물을 닦고 주차장으로 이동해요.
빨개진 눈을 보신 교구목사님이
슬쩍 가려던 저를 잡고
기도해주셨어요.
많은 인파 속에서
창피함도 모르고
기도에 파묻혀 통곡을 했어요.
이때, 해소된 감정이
다음날의 수술까지도 이어져서
담대한 마음,
용기있는 마음,
두렵지만 이겨낼 거라는 마음으로
남편을 대할 수 있었어요.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마음,
맺힌 것이 풀리고,
막혀있던 것이 뚫려
수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마음을
기억해요.
보호자는 울 곳이 없어요.
환자 앞에서 울 수 없고,
가족 앞에서 울 수 없어요.
그런데, 한번은 울어야 해요.
그래야 버틸 수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닌 암 옆에서,
꼭 울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찾아서 해소해야 해요.
그래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