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은 늘 그렇듯 애매한 시간에 시작되었다.
해가 완전히 지지도 않았고, 하루가 끝났다고 말하기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마트에 들어왔다.
나란히 걷고 있었지만, 서로의 생각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냉장 코너 앞에서 잠시 멈췄다.
형형색색의 병들 사이에서 여자애는 과일 우유 하나를 골랐다.
선택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그건 이상하게도 그녀답다고 느껴졌다.
남자애는 그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 앞에서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지갑을 꺼냈다.
그 행동은 친절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까웠다.
계산원이 금액을 불렀을 때, 그는 봉투값까지 함께 내며 웃었다.
웃음은 가볍고, 조금 과했다.
“이건 투자야.”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사주니까, 10년 뒤에 2억으로 갚아.”
말은 장난처럼 공중에 떠 있었고, 그 말이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자애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은 계산대 위에서 미묘하게 길어졌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진지하게 물었다.
“그때도… 나 볼 거야?”
그 순간, 마트는 더 이상 마트가 아니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남자애의 얼굴이 붉어졌고, 그는 그 변화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감정은 늘 그렇듯,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찾아왔다.
“지랄하지 마라.”
그 말은 거칠었지만, 이상하게도 방어에 가까웠다. 그는 과일 우유를 계산대 위에 남겨둔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짧게 울렸다.
여자애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크게도 아니고, 소리 내지도 않은 웃음이었다.
다만 마음 한쪽이 느슨해지는 느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
그녀는 과일 우유를 들고 마트를 나섰다.
저녁 공기는 여전히 애매했고, 그래서 더 좋았다.
어쩌면 어떤 약속들은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특히, 10년쯤 뒤에나 값이 매겨질 이야기라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