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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Jan 29. 2024

엄마처럼 살기 싫었는데

딸이 데려온 남자는 열살이나 많았고 전라도사람이었다. 이것 말고도 외할아버지가 아빠를 싫어할 이유는 참 많았다. 엄마는 참 어려운 사랑을 했고 그 덕에 친정식구들과 18년이나 연을 끊고 살았단다.


그 대단한 사랑은 엄마를 가족도, 친구도 없이 오직 아빠 하나만 있는 진도로 내려오게 만들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집. 도시에서 하던 광고일을 진도에서도 몇 해 이어갔지만 결국에는 할머니의 농사를 물려받게 되었다.


사실 물려받을 것도 없을 정도로 참 보잘 것 없는 재산이었다. 엄마는 밤낮으로 일을 했다. 밖에서는 생전 처음 해보는 농사일, 안에서는 늙은 시부모와 학교다니는 새끼 둘을 모시는 집안일. 둘 다 어린 엄마에게는 참 서툴고 무서웠을 것이다.


유난히도 사춘기의 투정이 심했던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화장도 좀 하고 자모회같은 것좀 하면 좋으련만 우리 엄마는 밭에 가랴, 집안일 하랴 늘 촌스럽고 정신없었다. 식구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 했다.


나는 엄마처럼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다. 이 지긋지긋하고 가난한 시골, 무엇보다 농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진도에서 멀리 도망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를 했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보고 자란게 농사라서 그런지 내가 선택한 전공도 결국에는 '경영'이었다. 농업이 아니라 경영을 선택한 이유도 힘들게 농사짓는 우리 부모님, 친척들, 이웃들이 제값받고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답은 유통, 마케팅 이런 것들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중학생 때 엄마는 미니홈피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은 시골살이, 결혼생활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무엇보다 당신이 선택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미니홈피에 농사와 시골에 대한 하소연, 가끔은 저주섞인 투정을 올렸다.


하늘이 보기에도 착한 우리 엄마가 불쌍했던지, 정말 우연히 파도를 타고 들어온 어떤 분이 엄마의 이 투정 가득한 농사일기를 읽게 되었다. 농약 안 한 그 맛있는 배추 살 수 있을까요?


그 때는 배추나 대파 따위를 택배로 거래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얼마를 받아야 할 지도, 어떻게 보내야 할 지도 몰랐던 엄마는 손님이 부르는 대로 값을 받고 마트를 돌아다니며 라면박스를 주웠다. 이것이 우리 농장의 첫 직거래다.


라면박스에 담긴 작고 못났지만 정말 정말 맛있는 배추는 그 아파트단지에서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그렇게 농산물직거래 브랜드 진도농부의 전설이 시작되었다.


만약 시간이 지나도 우리 엄마가 별 보고 밭에 나가 별 보고 들어오는 생활만 반복했다면 나도 경영을 전공해서 우리 농장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사실 나의 계획은 좋은 직장, 그러니까 대기업이나 관공서 중에 농업유통을 담당하는 곳에 들어가서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나라 농민들이 제값받고 농사지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얼마나 귀엽지만 바보같은 생각이었던지. 어렵게 들어간 한 중견식품회사의 인턴기간동안 내 다짐이 무척 순진하고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업에서는, 심지어 우리나라 농민들을 위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기업마저도, 10원 한 장을 위해서 최대한 인건비가 저렴한 곳으로 공장을 옮기고 최대한 저렴하게 식재료를 공급받기 위해 업체를 바꾸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한 대기업 식품회사의 높은 분께서 나의 포부를 듣더니 이렇게 말하셨다. 그런 생각이면 농협이나 들어가지 왜 기업에 오려고 하세요?


내 다짐과 계획이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잠을 줄여가며 하루에 두 세개씩 부지런히 스펙활동을 하던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몸과 마음을 축내가며 '참았던' 것인가.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어느 날 엄마가 전화를 했다. 넌 왜 남들처럼 이력서 한 줄 채우려고 아둥바둥 사니?


엄청난 일침에 어벙벙해져 대답도 못 하고 있는데 엄마가 말을 이었다. 지금 힘들다고 놔버리면 다른 게 아까운 게 아니라 우리 고객님들과의 인연이 아까운 거야.


그때 우리 엄마는 꽤 자리를 잡아서 다음(Daum) 우수블로거로서 기술센터에서 강의도 하러다녔다. 밤에는 주문을 받고 낮에는 택배를 보내고 새벽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집안일도 해야 했다. 엄마는 꽤 버거웠던 모양이다.


분명 나에게 부담을 줄 수 있으니 엄마의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격상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다. 그렇게 엄마는 내게 진도에서 '진도농부'로서의 삶을 제안해주었다.


정말 오래 고민했다.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스펙을 쌓았고(분명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지금 생각하면 엄마 말대로 겨우 이력서 한 줄 더 채우려는 몸부림이었을 뿐) 인턴으로 다니던 식품회사에서도 마지막 학기를 다니지 말고 바로 사원으로 입사하는 것을 제안했던 시기였다.


잠깐. 내가 왜 회사를, 그것도 굳이 식품회사를 가려고 했지?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지금 내가 식품회사를 다니는 게 우리나라 농민들에게 도움이 될까?


스스로에게 정말 많이 물어보았다. 결국 내가 진도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다른 것보다도 엄마의 변화 덕분이었다.


평소 소극적이고 자주 우울해하던 엄마가 직거래를 하면서 정말 많이 변했다. 내 물건의 가격을 직접 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에 맞게 더 좋은 물건을 보내야 한다는 책임감, 어떻게 하면 고객님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세, 무엇보다 진도에서의 날들 중에서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떠났는데 엄마처럼 되고 싶어서 돌아왔다.


2014년 12월의 어느 금요일. 대학의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졸업식도 치르기 전에 진도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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