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빼앗긴 날 이후, 한동안 나는 배터리에 충전을 하듯 잠으로 일상을 채웠다. 최근 아니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몰아치듯 자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먹고 자는 일이 반복이던 젖먹이 시절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다행히 무거웠던 머리가 차츰 가벼워졌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일까. 쉬이 잠이 들고 매사에 쉬이 잊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무게가 느껴지는 일들은 감정들은 툭 밀어버렸다.
지난번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문득 일주일 전에 만났던 한의사가 떠올랐다. 교회 집사님의 추천으로 간, 침술로 꽤 유명한 한의원이었다. 고3때 허리 디스크로 고생한 태루의 치료가 방문 목적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지루할 것 같아서 나도 태루와 함께 진료를 받았다. 나는 그저 체질에 대한 진단을 받아 볼 요량이었는데 한의사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굉장히 그릇이 커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이나 감정을 다 담아주지요. 다 품어주지요. 그런데 정작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이나 불만을 표현하는 일이 힘들어요. 그래서 그 화가 지금 이 위까지 꽉꽉 차 있어요."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그것이 화로 남을 일이었던가. 그 화가 속병이라도 들게 했다는 말인가. 한의사는 화를 내리는 반신욕은 권하고 보양식은 피하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1주일 간격으로 만난 한의도 양의도 나에게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했다.
내 몸은 충전이 필요한 빨간불을 오래 전부터 내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은 파란불이 채 들어오기도 전에 일상을 시작한 잘못일까. 자만일까.
요사이 나에게 새로이 생긴 버릇이 있다. 문득 멍해지거나 이명이 생기려고 하면 눈을 감는다. 재부팅을 하듯이. 그리고 마음의 코르셋을 벗어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