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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씨 Jun 24. 2023

어느새 6개월, 나는 달라졌을까

캐나다에서 180일 두줄 요약

그동안의 내 삶에는 제법 변화가 많았다. 처음에 삶의 전환을 맞이할 때는 그토록 충격적이고 특별하게 느껴지더니, 이제는 그냥 '살다 보면 이런 일들이 생기는 법이지' 싶다. 2023년 (정확하게는 2022년 12월) 나에게 다가온 변화 또한 그 중의 하나다. 엄청날 것도 없고 주눅들 일도 없는, 인생을 항상 신선한 상태로 유지해주기 위해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여러 파도, 그 중 하나.


의심을 버리고 루틴을 찾는다


비밀이지만 나는 정말 타인을 잘 믿지 못한다. 쉽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금방 친해지고 의지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다는 것 안다. 정직하게 말하면 그건 생존을 위해 터득한, 나에게 가장 적합한 소셜 스킬(social skill)이다. 어느 선까지는 아무리 오픈해도 내게 되돌아오는 리스크가 크지 않고, 이 이상은 절대로 선 넘지 않는 게 좋다는 측정이 내 안에서 쉴새없이 돌아간다.


수없는 상처와 실패를 바탕으로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새 만들어낸 일종의 방어장치 같은 거라고 이해하면 된다. 다만, 오랜 시간 겪어본 바 이러한 불안이나 의심이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 대인관계나 중요한 태스크가 망가지게 된다. 그래서 이를 잘 포장하고 상대에게 너무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내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닳도록 연습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낯선 곳에서 피어오르기 딱 좋은 첫번째 감정은 바로 ‘의심’이다. 원래도 경계심과 불안이 높은데 환경이 바뀌었으니 그 강도가 더더욱 높아졌고, 긴장 상태는 나의 유일한 스트레스 체크 지수라 할 수 있는 수면 불규칙(부족 아님)으로 이어졌다. 사실 수면 뿐만이 아니라 반복되는 루틴이 사라지는 일상은 위험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수면 시간을 되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여기에 도움이 된 것 3가지.


가장 먼저는,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언급한 적 있는 산책하기. 서울에서 '걷는 활동'을 단 한 번도 즐겁게 여긴 적 없던 내가 여기서는 풍경에 홀려 걷다 보면 2시간도 금방이다. 정신 차리면 너무 멀리까지 나가 되돌아오느라 고생한 적도 있음. 다만 한달 전 발목을 호되게 다쳐 몇 주 걷지 못했다. 드디어 보호대를 풀렀으니 이제 다시 매일 산책이다!


두번째는 시간 분배를 기록(tracking)하는 것인데, 옛날식으로 스프레드 시트에 일일이 채울까 하다 그냥 기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체 얼마나 시간이 모자라길래 이렇게 자꾸 회사와 일상의 일들이 밀리는지 파악하고 싶어서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회사'와 '일상' 사이의 균형이 얼마나 잘 유지되고 있는지 점검하는 데 아주 유용하게 잘 활용하고 있다.   


마지막은 역시 온 팀이 노력하고 있는, 싱크 일찍 마무리하기. 이것만큼은 아직 현재 진행형으로 최적화 중이다. 그간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파편화된 시간 때문이라고 믿어왔는데 최근 더 중요한 원인을 발견했다. 주간 업무(미팅, 인터뷰, 상담 등)를 밤에 하고 야간 업무(글쓰기, 분석하기 등)를 낮에 하게 되면서 하루의 기승전결이 일그러져 버렸고, 양쪽 다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튼 의심을 버려 루틴을 찾은 것이 아니라 루틴을 만들어 의심이 피어오를 일을 줄였다고 하는 쪽이 맞다. 맑은 정신일 때 차근차근 계획하고, 혼란한 마음일 때는 자꾸 이를 재점검하는 대신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하는 게 좋다. 아, 그리고 의심은 꼭 남을 의심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의심하는 것도 무척 많이 포함한다.


이제 고작 몇 달 지났을 뿐이라, 올해 말 쯤에는 제발 "시차가 있는 곳에서 리모트 근무를 하려면 말이야, 엣헴-" 할 수 있기를. 


제 2의 강릉, 내 두번째 마음의 고향을 만나다


여전히 운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길게 달리는 여정 사이 사이 이름모를 공원이나 호숫가를 들러 천천히 이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덕분에 네비게이션 이동시간은 1시간 20분으로 표시되는 지역을 가려고 출발하면 대충 4시간 반 정도 걸려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곤 한다. 그렇게 해도 될만한 여유로운 시간과, 늘 새로운 곳이 또 나오는 이 대자연의 땅이 정말 좋다.


살고 있는 곳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도시가 있다. 이름은 칠리왁(Chilliwack). 딱히 특징은 없는 평범한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도시 중 하나인데, 나는 여기에 반해버렸다. 


꽤 오랫동안 나는 강릉을 마음의 고향으로 두고 살았다. 강릉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과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는 아지트가 있었다. 삶이 힘들어 딱 멈춰버리고 싶을 때마다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꼬박 세 시간 반을 달려 강릉으로 숨어버렸었다. 강릉은, 미역국 한 그릇과 잠깐 동해 바다를 마주하는 시간만으로도 갑자기 인생이 살만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주는 산소 호흡기였다. 


칠리왁까지 가는 여정이 딱 그랬다. 차로 달리는 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들었지만 훨씬 더 멀리 가는 기분이 들게 하는 마법이 있다. 도로 좌우 가득한 초록 나무들 뒤로 대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거대한 설산이 보인다. (나중에 지도에서 찾아보니 무려 미국에 있는 산이었음) 인근에서 주유비가 가장 저렴한 동네도 지날 수 있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넓은 농장들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하면 칠리왁에 다 온 거다.

이 날 이 시간을 절대 잊을 수 없을거야


폭우 쏟아지는 날에도 햇살 쨍쨍한 날에도 칠리왁 시내로도 외곽으로도 가봤다. 농장 한쪽에 놓인 미니 하우스(Tiny house)에서 자고 온 날도 있었다. 밤하늘 쏟아지는 별은 기본이고 지나가다 멈추면 시원한 강가 풍경 아니면 깜짝 놀라게 아름다운 호수가 등장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칠리왁만의 독특함이 아니라 흔한 대자연 도시 모습의 일부인데, 어쩌다 보니 사는 곳에서부터의 거리라던지, 자연과 문명의 비율, 근처 여행지 등등이 아주 나에게 딱 적당했다.

Tiny House 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이와 별개로 도로의 풍경 자체가 너무 아름다운 길이 있다. 이름은 99번 하이웨이. Sea to Sky 라는 공식 별명을 가지고 있는, 캐나다 서쪽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는 도로이다. 정말 경치가 끝내주는데 내가 운전하면서는 사진 한 장은 커녕 고개 돌려 한눈 팔 수도 없을만큼 난이도 있는 산길이기도 해서 늘 아쉽다. 누가 나 조수석에 좀 태워줘요. 다만 이 도로를 계속 달려 늘 도착하고 싶은 '목적지'는 아직 찾지 못했음.

이미지 출처: 구글(iStock)





5월이 시작하자마자, 지나간 1-4월을 회고하겠다며 이 포스팅을 쓰기 시작했지만 결국 6월의 끝을 바라보는 지금에야 발행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채널톡 생활 2주년도 지났고, 캐나다 생활 180일도 넘겼다. 만 6개월을 꽉 채우던 날에는 아이와 팝콘을 함께 놓고 넷플릭스에서 사이렌:불의 검을 시청하며 자축의 시간도 가졌다.


어느새 절반 남은 2023년의 목표가 있다면? 속도를 내려고 너무 서두르지 않는 것, 내 페이스를 조절하는 것. 온 세상이 나에게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 해낼 것을 요구하는 와중에 물리적으로 꽤나 더딘 사회에 속해 있음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절대 뛰지 말자, 잘 딛어보자 넘어지지 않게, 그래서 오래 오래 걸어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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