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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Jun 24. 2021

#22. IMF

- 상실의 시대 : 사라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기

<오늘의 메뉴>

오이소박이, 건새우볶음, 꽈리고추 찜, 꼬막무침, 계란 프라이


 "야. 너랑 너랑 이렇게 재수가 없냐. 하필 우리 입학 때 IMF가 터지냐."


 이모네 안방에서 대학 입학을 앞둔 사촌언니가 중학교 입학을 앞둔 나에게 말했다. 그저 입학 축하 용돈을 덜 받게 되었다는 언니의 푸념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IMF는 상상 이상으로 큰 파도를 뒤에 숨기고 우리 일상을 한순간에 덮쳤다.


 당장은 남 일이었다. 은행원이셨던 아버지는 여전히 아침에 출근하셨고 용돈은 그대로 나왔다. 매일 저녁 밥상 앞에 틀어둔 뉴스에서는 회사들의 도산 이야기가 쏟아졌고 가정의 해체, 일가족 자살 사건이 당연한 듯 나왔다. 건너 건너 누구네 집 아버지가 파산하고 도망갔단다. 지금 집이 압류당해서 친척집으로 이사 간 단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먼 일이었다.


 끔찍한 사건을 뉴스를 보면서 여전히 밥 잘 먹고 학교 잘 다니고 친구들과 즐겁게 일상을 보냈다. 남의 이야기였다. 나의 일상은 IMF와 전혀 관계없이 평안했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아버지가 재직했던 '대동은행'이 없어졌다. 대동은행의 마스코트였던 돌고래 배지를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때부터 내 일상에 잔잔한 불안감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아. 뉴스에 저 일들이 곧 나에게 올 수도 있어. 아빠의 은행도 대동은행처럼 사라질 수 있어.

하지만 아빠는 늘 같은 시간에 양복을 입고 출근하셨고, 뉴스에서 나오는 끔찍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우리 가족이 아직 나오진 않았다.


 어느 날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데 아빠가 일찍부터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합병 반대 시위 가셨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집중할 수 없었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마다 교실 텔레비전을 틀어 뉴스를 실시간 보았고 광장에 앉은 수많은 은행원들 중 아버지의 얼굴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날 아버지가 대동은행에 다녔던 돌고래 친구가 떠올랐다. 나는 그날 돌고래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한 것이 아니라 순간 우리 아빠가 대동은행이 아니라 다행이다 생각했었다. 그날의 악한 내가 생각나서 수업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나쁜 맘을 먹어서 우리 아빠 은행도 이렇게 되는 건가 어린 맘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아빠는 그날 저녁 담담하게 집에 오셨고, 내 기억에 부모님은 imf에 대해 집안에서 일절 대화하지 않으셨다. 그저 숙제 다했냐? 내일 준비물 없냐?


  그때는 매일 밤 안도하며 잠들었지만 30대 후반의 부모님은 우리 남매가 잠들고 현실의 이야기를 나누며 걱정을 하셨겠지. 내가 그때의 나이가 되어보니 조금씩 알 것 같다.

현실은 태풍이지만, 집안에서 아이들에겐 화창한 꽃밭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 30대 후반의 부모님은 그 당시 우리 남매에게 화창한 날들만 보여주기 위해 자식이 잠든 밤이면 방문을 닫고 미뤄뒀던 태풍을 끄집어냈을 테다.


 아빠의 '조흥은행'도 사라졌다. 다른 은행에 다행히 합병되어 실직자의 현실은 면했지만, 이제 더 이상 '조흥은행'을 말할 일이 없어졌다. 조흥은행의 빨간 나무 배지와 CHM조흥은행이 찍한 통장이 옛날 물건이 되어 곧 사라진다. 오랜 시간 일했던 아빠의 마음은 더 헛헛했겠지만 감수성 예민한 10대인 나에게도 조흥은행이 사라지는 것은 상실의 사건이었다.


  화려한 시절을 보냈던 아빠 은행 동기분들의 소식이 하나씩 들려왔다. 대부분 명예퇴직 후 사업을 시작했고 곧 얼마 가지 않아 부도가 나고, 이혼을 하고, 다른 동기들에게 돈을 빌려 도망갔다는 이야기.

우리 아빠는 본인 스스로 사업할 그릇은 안된다시며 지금까지 샐러리맨으로 살아가셨다. 그 덕분에 잔잔한 파도 이상의 태풍이 우리 집을 오진 않았지만 아빠 역시 함께 지냈던 동기들에게 받지 못할 돈을 많이 빌려주셨다. 어느 날 엄마랑 이모가 아빠의 돈을 가지고 도망간 동료 집을 수소문해서 찾았지만 초라한 모습에 그냥 빈손으로 돌아오셨고 엄마는 어느 날 잊겠다 하셨다.

더 이상 은행원은 화려한 직업이 아니었다. 더 이상 여성잡지에서 1등 신랑감 직업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imf를 겪으며 내 장래희망이 '은행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글로 학창 시절에 크고 작은 상을 받았지만 밥벌이를 할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경험과 삶의 연륜이 쌓여 노인이 된 어느 날 운이 좋으면 등단해보겠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서점에 가면 내가 생각도 못한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고 내가 재능이 뛰어난 작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밥벌이의 직업이 필요한데 그것 역시 공무원, 교사는 아니었다. 이왕이면 즐거운 일하자. 밥벌이 일이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관심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자.

그래. 나는 imf를 겪으며 경제 신문 읽는 것을 좋아했고 경제 용어 사전도 용돈을 모아 2권 사서 읽었다. 경제 관련 그래프를 보면 다 인과관계가 있었다. 어떤 학문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확하게 연결된 일이었다.

고등학생 때 은행원이라 쓰고 제출하니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꿈을 더 크게 가져라."

책상 위에 다른 친구들의 종이에는 대부분 의사, 변호사, 공무원이었다.


 조금씩 일상이 바뀌었다. 돈은 매일 당연하게 나오는 것이었고 우리 집에 요술 금고가 있다고 착각했었다. 어느 순간 돈을 아빠가 어떻게 벌어 가지고 오는 것인지, 나의 일상의 평화를 위해 희생된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물건을 소비할 때 실용성을 가장 중요히 따졌다. 예쁘고, 사고 싶어서, 갖고 싶어서. 더 이상 이런 이유로 소비할 수 없었다. 새로운 물건을 살 때 기존에 가진 것과 조화를 따져야 했고 이것을 소비함으로 이득이 무엇인지 계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새 학기마다 친구들의 '장래희망'이 재미없어졌다.

대통령, 우주비행사, 요리사 수많은 다양한 직업이 나왔던 교실에서

"공무원, 교사" 이 두 가지 직업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학창 시절에 나는 장래희망에 공무원을 한 번도 적은 적이 없었다. 공무원이라 적는 순간. 내가 IMF에 지는 것 같았다.

내 주변의 일상은 네가 흔들리게 했지만 절대 내 꿈은 뺏기지 않겠다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내 장래희망까지 현실에 맞춰 공무원, 교사가 되는 순간 정말 imf에 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 우리 집도 수많은 태풍이 현관문 앞에 찾아왔다. 부모님이 우리 남매에게 꽃밭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현실의 파도는 너무 높았다. 꽃밭을 지나 진흙탕에 발이 빠지기도 하고 자갈밭에서 발을 다쳐 멈추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온 후 돌아보면 그 험난한 길을 걸으며 단단한 어른이 되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다 끝났다 체념하는 내게 엄마는 "끝까지 살아봐야 안데이. "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그 늪도 그냥 내 과정 중 한 부분이었고 이걸을 빠져나옴 내 끝은 더 빛날 테지 힘을 냈다.


 그리고 어렸지만, 남의 불행에 무감각하게 받아들인 지난날을 반성한다. 지금은 주변의 어려움에 관심 갖고, 민원인의 조그만 불편도 내 일처럼 생각하고자 노력한다.

요즘 주식으로 재테크를 하는 지인들이 우리 부부를 안타깝게 여기지만, 지금의 가진 것에 만족하며, 앞으로의 부족함도 건강한 육체와 정신으로 조금씩 채워나갈 것이다. 경제적 풍요가 영원할 수 없음을 알았고 그것이 진정한 삶의 행복이 될 수 없음을 우리 가족은 이제 알고 있다. 누군가는 소박해졌음에 비웃을지 모르나 화려한 시절을 지나 본 나로서는 무탈함이 얼마나 힘든 것이고 행복인지 알고 있다. 평범한 삶이 정말 가장 어려운 일이며 잃어봐야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imf가 내게 준 삶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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