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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Jul 02. 2021

#23. 좋은 사람

- 혼자만의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까

<오늘의 메뉴>

(저녁 반찬까지 만든) 가지, 호박전, 스팸


 대학생 때 인턴 생활을 2달 같이 했던 동기를 우연히 사회에서 업무적으로 만난 일이 있었다. 어색하지만 반가운 안부가 오가다 그 친구가 한 한마디가 집에 와서도 내내 생각났다.

 

" 다행이다. 예전에 남의 부탁 다 들어주고 코뿔소 저래서 사회 적응하겠나 다른 동기들하고 걱정했었는데. "


당시엔 뭐야. 내가 때 묻었다는 거냐 웃으며 말했는데 집에 와서 그 말이 계속 떠나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내 별명이 '부처님'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같은 반 남자아이가 어느 날부터 부처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느새 애들도 그렇게 말했다. 난 늘 남이 보면 줏대가 없는 아이였다. 특히 식당을 가면 메뉴 선정에서 늘 "아무거나. 너희 먹고 싶은 거 시켜."

어느 날부터 친구들이 식당에서 내게 메뉴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너 아무거나 하잖아.

내 구역 청소가 마치면 다른 친구 구역 청소를 같이 하고 하교했고, 인턴 때도 내 담당 업무가 끝나면 퇴근 시간 전에 다른 동료의 단순 작업을 옆에서 도와줬다.

친구들은 취향 없는 내가, 본인들의 일을 도와주는 내가 부처님으로 보였나 보다. 그때부터 학급 시간에 서로 마니또를 하거나 롤링페이퍼를 돌이면 늘 "코뿔소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가 늘 붙었다.


  사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의 친절은 진심이 아니었다. 나는 음식에 취향이 없다. 딱히 가리는 것도 딱히 너무 좋아하는 것도 없다. 뭐든 골고루. 고수 같은 향이 강한 음식도 먹으면서 아. 가끔 새로운 것도 먹으면 좋지. 우리 엄마는 늘 반찬 할 때 간을 동생에게 보라 하셨다. 나는 늘 "응. 맛있어" 짜면 짠 대로 밥 더 먹으면 되고, 싱거우면 오늘 건강에 좋겠네. 그것대로 오케이.

학교 다닐 때 청소도 친구가 빨리 마쳐야 같이 하교를 하고 집에 갈 수 있으니깐.

업무도 동료의 업무가 언젠가는 나도 해야 할 업무니 미리 파악해볼까? 미리 해보고 도저히 나랑 아닌 것 같으면 다음 부서 면담 시 고려해야지.

사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을 위한 배려였고, 친절이었다. 그래서 그 "좋은 사람"이란 단어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런데 그 "좋은 사람" 연기도 사회인이 되고 계속할 수 없었다. 사회는 정글이었고 정말 사악한 뱀,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인류애가 상실될 만큼.

후배의 아이디어를 본인 이름으로 수상하는 경우는 그냥 사소한 일이었고, 업무의 위기에서 같이 도와줘도 상대의 위기에선 쿨하게 퇴근하는 인간들을 보며 나의 연기가 계속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도 나는 저런 사악한 뱀이 되지 말자. 후배의 위기를 같이 대응하고, 동료의 실수를 같이 주말 시간에 수습해줬지만, 그 사람들이 내 위기에서 무조건 도와주는 건 아니었다.

대가 없이 베푸는 선의가 진정한 선이겠지만, 난 거기까지 받아들일 만큼 성인은 아니었다.

아. 이것 봐라. 이렇게 나온다는 거지. 좋다. 두고 봐라. 너의 위기를 나는 누구보다 모른 척할 것이며, 너의 평가에 대해 누군가 묻는 날 누구보다 직설적이진 않게, 하지만 누구보다 정확하게 말해야지.


  출근을 하며 갑옷을 입고 나만의 무기를 장착하기 위해 업무 능력을 누구보다 키우려고 노력했다.

내 능력은 사회에서 좋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고,

나쁜 사람에게 누구보다 강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내 위기에서 상대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도록 내 힘을 길러야 하고 누구보다 업무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 늘 조급하고 치열한 생활들이었다.

물론 좋은 사람들에겐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어 나에 대한 평가가 나쁘진 않았지만, 새 부서가 배정되고 새로운 팀원들을 만나면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뱀인지 가리는 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그냥 가끔은 사악한 뱀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늪에 빠진 하이에나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내 마음속의 선은 딱 거기까지 였던 것이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선을 지킬 수 없고, 결국 주변에 흔들릴 만큼 나약하고 치졸한 마음이었다. 나보다 더 사악한 정글 속에서도 꿋꿋하게 좋은 사람인 사람들을 몇 년에 한 번씩 만난다. 이 사람들의 강인함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 까. 선천적인 부분일까. 그런 면에서 나는 결국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일 까. 가끔 해답 없는 물음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문다.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는 모두 다르겠지만, 떠올리는 이미지는 아마 비슷할 것이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남아야 한다는 강박증은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은 결국 혼자 일 수 없고 끊임없이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하니 그래도 나는 내 세계 안에서 좋은 기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 사악한 뱀이 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때도 분명 있지만, 결국 당장 내일의 내 손에 쥔 것을 생각지 않고 더 멀리 생각하면 뱀은 사라진다. 이 순간 하이에나가 되어 당장은 희열을 느끼겠지만, 그게 결국 내 마음을 더럽히고 날 추잡한 인간으로 만들면서까지 가치 있는 것인가. 그러면 행동은 간단해진다.

그리고 다른 좋은 사람들을 위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 역시 혼자만의 힘으로 굳건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나 같은 사람들이 분명 있다 생각한다. 그들에게 잠시나마 좋은 사람으로 연기라도 한다면 그들도 다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지 않을 까. 결국 우리는 다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니, 같은 세계에 있다면 서로 비슷해지지 않을 까.


 아. 그리고 나는 좋은 사람이란 무조건 상대의 말에 맞다 해주고, 상대의 의견을 따라주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음식 메뉴의 취향쯤은 따라준다고 정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니 앞으로도 꾸준히 음식 취향 없는 사람으로 남겠지만, 누구보다 그가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에 적어도 반한다 명확하다면 나는 그 사람을 앞으로 보지 않아도 그러면 안된다 말해줄 수 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란 좋은 기운으로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소심하고 가끔 줏대 없지만 오늘도 나는 좋은 사람으로 연기하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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