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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마물고기 Aug 14. 2021

#27. 기억의 습작

- 이십대의 피카소

<오늘의 메뉴>

친구와 먹는 샌드위치, 참외, 사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서울에서 '피카소 전시회'가 열렸다. 지금은 뭔가 피카소란 이름이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때 당시 서울에서도 열리는 전시회인데도 불구하고 대중매체에 자주 나왔다.

친구에게 기차 타고 보러 가자 물어보니

 "ktx값만 10만 원 돈이다. 거기에 입장료에 가서 밥 먹고 뭐하면. 그냥 서울 구경하러 가자면 갈게. 난 미술 잘 몰라."

그런데 미술의 '미'자로 모르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술이라면 동양화, 서양화 구분밖에 몰랐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엄마가 "우리 같이 가서 보고 올까?" 그랬다.


 당시 우리 집은 조금 어려웠다. 주변에서 보면 번듯한 직장인인 아버지와 누가 봐도 중산층의 삶을 잘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 많고 거절 못하는 우리 아빠가 예전에 친구들에게 써준 보증이 문제가 생겼었다.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겐 여전히 우리 아빠 은행원이야 했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오면 마치 연극 무대에 올랐던 역할의 옷을 벗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은 여전히 '괜찮다. 너희 할 일이나 잘해라.' 했지만 눈치 빠른 장녀였던 나와, 남동생은 어둑한 밤. 놀이터 가로등 아래에서 그네를 타며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집안 문제로 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피카소라니. 것도 엄마랑 서울에 기차를 타고. 엄마랑 얼떨결에 기차를 타고 있었다. 엄마는 기차에서 잠이 들었고 나는 문득 어릴 적이 생각났다. 엄마는 늘 우리 남매에게 인형극, 박물관, 전시회, 음악회. 문화예술 경험에 굉장히 자주 접하게 하셨다. 처음엔 이미 동화책으로 아는 이야기를 인형극이나 연극으로 보며 따분했지만 그런 일들이 쌓이면서, 장소에 맞는 옷차림, 예절을 다른 관객들을 보며 배웠고 아는 이야기도 전달받는 방식에 따라 감동은 달라졌다.

별 것 아닌 전시회가 잠든 내 꿈에 여러 번 나타나기도 했고 그림을 보며 가슴이 뛴다는 것도 느낀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음악회에서 알지 못하는 음악가, 음악을 듣는데 내 심장이 쿵 땅에 떨어져 손으로 주워야 할 것 같은 느낌도 느낀 적이 있었다.

마치 놀이기구를 타며 느낀 마음이 단순히 음악이 귓가로 온다고 느껴진다니. 신기한 체험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치고 단조롭고 각박한 삶에서 예술만큼 사람을 위로하는 건 없다.

힘든 날은 날 위로하기도 하고,

열심히 달리는 날에는 더 잘해보자. 결과에 상관 말고. 용기를 내게 하는 것도 예술이었다.


 서울에 도착에서 지하철을 타고 전시회에 도착했는데 엄마는 한 바퀴를 다 돈 후 내게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 여기 앉아 쉬고 있을게. 혼자 한 번 더 보고 와."

혼자 찬찬히 보는데 미술에 무식쟁이인 나도 느끼는 마음은 지식에 상관없이 광활했다. 텔레비전에서 인터넷 화면에서 봤던 그림이었다. 하지만 직접 실물로 내가 그림과 마주했을 때 순간은 10년이 넘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직 작품과 나만 서있는 기분이었다.

"어때? 내가 피카소야. 너는 오늘 내게 무얼 얻어갈 거니?" 우두커니 서있는 내게 다정하게 묻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단지 그림인데. 것도 내 취향과는 먼 작가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에드워드 호퍼의 팬이다) 그림 앞에서 서니 그냥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한번뿐인 대학생활 즐겁게 더 해보자. 결과에 상관없이 뭐든 치열하고 행복하게 해 보자. 졸업 때는 내가 만족할 만한 명함을 가져보자. 이유 없는 다짐이 줄줄 마음속에서 나왔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지나 엄마가 앉은 곳으로 나오니 엄마가 조금 지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서글프면서 마음속이 울렁울렁 잔잔한 파도가 흐르는 것 같았다.

엄마의 지금의 삶이 서울에 기차를 타고 피카소를 볼 만큼 잔잔하지 않을 텐데. 자식이란 무엇일까. 보고 싶다는 말에 대가 없이, 계산 없이 선뜻 가주는 마음이 감히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이런데 오면 기념 책자를 사 가야 해. 그래야 네가 가끔 보면서 오늘 감동이 살아난다."

당시 3만 원이 훌쩍 넘는 피카소 그림이 담긴 책자를 기념품 가게에서 사줬다. 아. 엄마 나 그 정도로 피카소가 내 취향은 아니었는데? 하니 엄마가 오늘의 감정을 잊지 말라며 선물해줬다. 그때 피카소 책자는 결혼을 한 내 서재에 자리 잡고 있다.

문득 눈길이 가면 엄마의 고마움, 부모의 마음, 그날의 감동, 기차의 추억, 이십대의 다짐 등이 마구 섞여 내게 따뜻한 기운으로 책장에 자리 잡고 있다.


 어둑해진 기차 밖을 보며 집으로 내려오는데 오늘 엄마한테 감사함, 더 잘해야지 마음보다는 사실 그림 앞에서 감동이 더 벅차서 즐거웠다. 집 안의 일은 조금 뒷전으로 물러가버렸다. 내가 걱정한다고 당장 해결할 수 없으니 그냥 나는 오늘 다짐대로 열심히, 즐겁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자.

아. 그래서 서울서울 하는구나. 문화적 혜택이 지방에서 보다 넓고, 선택권이 다양하구나. 비록 미술, 음악에 대해 많은 지식은 없지만, 감동의 깊이는 사람마다 평등하구나.


 부유하든,

빈곤하든,

상관없이 문화예술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에게 평등하구나.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빈곤한 사람들에게 이런 문화적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부유한 사람들이라고 마음이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내일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공과금 앞에서 마음 졸이는 사람들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니니깐.

마음적으로 더 힘든 사람들이 더 용기 낼 수 있도록, 단 몇 시간만큼은 현실을 잊고 감동을 느끼고 다양한 감정을 가질 수 있도록.


비록 당시 엄마와 내가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었고,

단지 그 전의 삶에서 한 계단 내려왔다는 절망이 컸던 시기였지만

그 몇 시간이 가끔 영원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그래서 나도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보다 인형극, 어린이 관람 전시회에 자주 데려간다. 처음엔 앉아있기 지루해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앉는 시간도 길어지고 나름 얌전하게 버틴다.

공연이 시작되기전 미리 화장실을 다녀와야 나중이   편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책으로 알려줄 수 없는 배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가 살면서 어려운 삶의 고비를 만나면 문화 예술로도 위안을 얻는 시간이 생겼으면 좋겠다.

굳이 거창하게 전시회, 음악회를 가지 않더라도 주변에 찾아보면 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문화예술이라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어떤 방식이든,

지불한 입장료가 얼마이든,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도

감동의 깊이와 기회는 동등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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