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방송작가의 다큐 제작기 #2
‘가족간의 사랑’과 ‘남녀간의 사랑’ 두편의 내용중 담당PD가 좀 더 애착을 가진건 남녀간의 사랑이었지만 좋은 출연자를 찾지 못해 남녀간의 사랑은 결국 제작되지 못했다.
남은 제작기간은 방송일을 포함해 3개월. '휴먼다큐멘터리 사랑'은 1년에 한번씩 방영되기 때문에 긴 시간동안 주인공의 변화된 상황과 감정을 다 담는게 특징이었다. 제작이 3개월 남았다는 건 정말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으로 촬영을 허락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를 만들어 찍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메인작가님이 한 기사를 보여주며 이야기 했다.
<청각장애 딛고 미스월드코리아 5위 입상 김혜원>
“봐, 예쁘지 않아? 이 아이로 하자.”
청각장애를 가진 고등학생 여자아이가 미스월드코리아 대회를 나가서 수상을 했다는 기사였다.
남녀간의 사랑을 제작하고 싶어했던 담당 PD는 떨떠름해했지만 일단 우리가 급한 상황이니 만나보기로하고, 기사에 나온 여고생을 포함한 가족들과 미팅을 잡았다. 첫만남이니만큼 우리의 호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짧은 수화를 인터넷을 보고 익혀갔다. 미팅자리에는 스무살의 해맑은 미소를 가지고 있는 미인대회 입상 사진과는 다르게 아직은 앳된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그 옆엔 단발머리의 여고생인 연년생 동생, 자매의 어머니가 함께했다. 만나자 마자 나는 미리 외워둔 어설픈 수화를 보여주었다.
“너무 예뻐요,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어 기뻐요.”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는 혜원이를 보니 기분이 좋았고 미팅 분위기 역시 좋게 흘러가 자연스럽게 촬영을 하기로 결정됐다. 우리가 앞으로 진행 될 촬영에 대한 설명을 하자 여동생은 혜원이에게 수화로 우리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수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동생 뿐, 부모님은 혜원이가 조금이라도 말을 할 수 있도록 일부러 수화를 배우지 않고 말하는 입모양을 읽도록 교육시켰다. 그 덕분에 혜원이는 천천히 말하면 간단한 의사표현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었다.
담당PD는 미팅을 끝낸 후 여동생 혜인이의 이야기 역시 궁금하다고 했다. 어릴때부터 혜원이와 혜인이는 어딜가든 함께였고 일 때문에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언니를 살뜰히 챙기며 집안의 장녀노릇까지 해온 동생이었다. 혜인이는 집안 사정을 일찍 깨닫고 실업계고등학교를 진학해 졸업 전에 은행에 취업하며 어엿한 6개월차 직장인이 되었다. 혜인이는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시작해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래도 언니를 대신해 집안의 장녀 노릇을 하느라 철이 빨리 들었구나 싶었다. 우리는 자매간의 사랑, 성장해가는 자매의 이야기로 풀어보기로 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때에도 아빠가 표 끊어주고 버스 태워주면 언니랑 둘이서 할머니 집 까지 갔다 올 정도였고 뭘 하면 늘 언니랑 하는 게 습관이었던 거 같아요. 친척들이 말씀해 주시는 거 보면 저는 갓 난 아기였을 때에도 언니 말 다 알아들었대요. 언니와 저는 의사소통에 불편함을 느꼈던 적이 어릴 땐 없었어요.
-혜인 (동생) 인터뷰 중에서-
첫촬영은 동생 혜인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집에선 항상 의젓하게 부모님과 언니의 대화를 이어주던 혜인이는 학교를 가자 보통의 10대 아이들처럼 활기가 넘쳤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시끌벅적하게 회사생활 이야기로 수다의 꽃을 피우다 졸업식이 끝나고 가족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혜인이는 졸업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처음 학교를 찾은 가족들과 졸업기념사진을 찍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간다. 바로 은행원으로서 학교에 계좌개설을 영업하려고 하는 것.혜인이에게 붙잡혀 말없이 상품 설명을 듣던 선생님이 참다가 한마디를 건냈다. “야 제발 넌 쫌 대충 살아, 졸업식날인데! 빨리 가족들한테가! ” 담임 선생님이 등떠밀어 보내자 혜인이는 그제야 교무실을 떠났다.
나이 스물도 안돼서 취업을 한다는게 마음이 많이 아팠죠. 아무래도 부모로서는 특별한 아이보다는 보통아이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집안에 빚이 얼마냐고 물어보고 자기가 돈 모을테니까 그것부터 갚자고. 빚 없다고하니까 전기요금, 가스요금 보자마자 자기가 은행가서 내고...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이 크죠.
- 자매의 어머니 인터뷰 중에서-
같은시기 언니인 혜원는 농아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미스월드코리아 대회에서 수상한 덕분에 한 대학교의 모델학부에 특채로 합격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혜원이가 대학생활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도 내심 다른 보통의 아이들과 대학생활을 한다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대학입학이 다가올수록 혜원이는 긴장되는지 일하고 들어온 혜인이를 붙잡고 걱정되는 마음을 토로했다.
지금까지는 농아인 학교를 다녀서 큰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해왔는데 이제 일반인들과 함께 대학생활을 해야한다니 걱정되고 떨린다고 했다. 친구들 만나는게 제일 기대가 되면서도 만나서 대화가 안될까봐 그게 제일 두렵다고...
기다려왔던 대학 오리엔테이션 날 아침, 혜원이는 데려다 주겠다는 엄마를 뒤로하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리조트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고 강당에 모여 친목을 위한 레크레이션 시간이 진행됐다. 레크레이션 강사가 신나게 분위기를 띄우고 게임이 진행되자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며 강사의 지시에 맞춰 무리를 지었다. 그 순간 영문을 모른채 한참을 어쩔줄 모르고 홀로 서있던 혜원이.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다가 다른 아이들 무리 속에 쭈뼏쭈뼏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촬영된 테입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보는게 속상했고 한없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혜원이를 그저 '예쁘고 밝은 아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아이'로 내 맘대로 규정하고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오리엔테이션 일정 내내 촬영된 테입 속 혜원이의 모습은 너무 외롭고 힘들어보였다. 말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혼자가 아니라는걸 확인하는 방법은 문자로 대화하는 것뿐. 자신과 다른 사람들 속에서 듣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뼈저리게 실감했을까. 2일간의 길었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혜원이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엄마는 혜원이랑 필담을 나누려했지만 그것마저 혜원이는 원치 않아했다.
저도 엄마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엄마가 무슨 이야기인줄 잘 모르겠다 써줄래? 그러면 내가 그걸 써야 하고, 그럴때 불편하고 좀 속상한 면이 있어요. 사실은 제가 힘들 때 다른 사람을 찾아서 대화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제 부모님과 대화하고 풀고 싶은게 솔직한 마음이었는데, 부모님은 수화를 모르기 때문에 이걸 써서 표현하는 것도 내 마음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고요...
- 혜원이 인터뷰 중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은 건청인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예가 많은데 가족 간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집안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거나 소외감을 느끼는 사례가 많으며 일방통행식 의사소통으로 정서적 불안을 느끼는 이도 많다.
- 청각·언어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복지칼럼] 13.12.24-
1학기의 개강일이 되고 혜원이는 어릴 적 가까이 지내던 수화통역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들었지만 적응하기 힘들어해서 결국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 뒤로 혜원이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여주는 걸 원치 않았고 촬영은 중단되었다. 다큐의 내용은 성장통을 겪고 있는 혜원이가 다시 자신감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가족들이 함께 지켜봐주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처음에 우리가 기대했던 '장애를 극복한 성공' 스토리도 아니었고, 촬영도 중단되어 제작진들은 이 아이템은 망한것 같다고 푸념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 작업이었다. 청각장애인들은 겉으로 봤을때 그 불편함이 티가 나지 않아 오히려 소외를 당하기 쉽다는 것, 한 평생 살아온 가족과도 속 깊게 대화할 수 없어
누구보다 외로운 존재라는 걸 아주 조금은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