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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ug 18. 2023

다시 중환자실, 그리고 욕창

책임공방의 폭탄돌리기

슬픈 예감이 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엄마가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 동생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전날 저녁 면회 때, 퇴원하겠다고 병원에 최종 통보했다. 이제 주치의 면담만 남았다. 요양원에선 엄마가 퇴원해서 돌아오시면 정서도 안정되고 드시는 것도 좋아지실 거라고 위로했다. 동생이랑 난, 엄마의 회복을 기대하며 오랜만에 가볍게 한잔 했다.

 

알람 소리가 아닌데… 꿈인가? 새벽 5시 34분,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깼다. 병원이란다. 엄마의 상태가 안 좋아져서 중환자실로 옮긴다고, 언제 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생과 나밖에 없는데 큰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아버지, 도와주세요.


전날, 서해대교를 건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병원을 오갈 때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유난히 푸른 하늘을 보며 마치 소풍을 떠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식도암 진단을 받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아버지가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얀 저 구름 너머에 계실 것만 같은 아버지께 기도했다.

엄마가 보고 싶으셔도 부디 조금 이따 불러달라고. 엄마가 아프지 않은 때 돌아가시게 해달라고. 어렵게 한 수술, 당신 힘으로 발을 딛고 걸으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요양원에 모신 지 1년여 만에 떠나시지 않도록, 부디 불효자의 마지막 ‘면’이라도 세워 달라고 기도했다.

외할머니처럼 92세까지는 사셔야 하지 않겠냐고,  엄마가 기도한 대로 주무시다 편안히 가게 해달라고.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고….

운전을 하다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의 부재가 서러웠다.




동생과 함께 새벽길을 달린다. 동생은 엄만 강하신 분이라고 괜찮을 거라고, 중환자실에 계시면 집중 케어를 받으니까 오히려 좋을 거라고 다짐하듯 말한다. 동생의 말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언제부턴가 내게서 희망이 사라져 버린 듯하다. 계속 두려워진다. 엄마가 위독하신 건 아닐까. 형제들 카톡방에 소식을 전한다.

 

부랴부랴 중환자실에 도착했더니 엄마는 아직 일반병실에서 내려오시지 않았단다. 병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위급한 상황은 아닌가 보다. 다행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엄마 침상이 중환자실로 들어간다. 검사를 해야 하니 또 기다리란다. 중환자실 앞 좁은 복도를 서성인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나온다. 다행히 엄마의 혈압은 괜찮고 산소포화도가 좀 떨어지셨단다. 그런데 말도 안 되게,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한다. 사진을 보여준다. 동생과 동시에 꺅! 소리를 질렀다. 도저히 상처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방치한 걸까.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저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애꿎은 중환자실 간호사에게 따진다. 엄마 짐을 챙겨 왔는지, 마침 담당 간병인이 지나간다. 내가 소리치는 얘기를 듣고 있나. 들어야 한다. 간병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 환자를 돈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그제야 얼마 전 동생이 한 얘기가 떠올랐다. 면회 시간이라 보호자가 있는데도 간병인이 신경도 안 쓰고 개인 전화를 하고 있더라나. 들어보니, 지난주에 네 명 돌보느라 수입이 짭짤했다고 했단다(6인실엔 보통 간병인 2명이 머무른다). 엄마 같은 환자가 또 있었나 보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실 때도 엄마의 간병비는 계속 나갔다. 간병인이 코칭하길, 공동간병인실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기에 ‘쿨하게’ 그러마고 했다. 어렵게 간병인을 구했으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팁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수술 후 하루이틀 머문다는 중환자실에 엄마는 꼬박 일주일간 계셨다.  


더 큰 문제는 간병인들의 태도였다. 동생이나 내가 갈 때마다 간병인들은 엄마가 뭘 안 드신다고 타박했다. 저런 양반이 더 힘들다고, 내가 웬만한 어르신들은 다 잘 먹이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엄마가 얼마나 드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정작 필요한 얘기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 보호자가 뭘 모른다고, 간호사한테 식욕촉진제나 처방해 달라고 하라고 아는 척을 했다. 병실엔 죄다 아픈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렸고, 간병인들은 그 소리를 뚫을 듯 큰 소리로 대꾸하거나 못 들은 척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엄마의 마음을.

저녁에 잠을 안 주무시고 새벽녘까지 중얼거리신다던 엄마는 갈수록 말수를 잃었고 급기야 식사를 거부했다. 엄마에겐 몸이 아픈 것보다 낯선 사람, 낯선 공간에 계신 게 더 힘겨운 일이었다. 치매 환자의 불안감을 모르는 간병인들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나는 돌봄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싫은 소리를 하고 싶어도 참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저 만만한 ‘호구’일 뿐이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엄마를 만나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하니 오전 면회 시간에 다시 오란다. 야속하다. 엄마의 상태는 천만다행이지만 간호사가 그 새벽에 전화한 건 단지 보호자 사인이 필요해서였다.


예정대로라면 주치의를 만나고 오늘 퇴원하려 했던 건데, 하루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동생은 출근하고 텅 빈 집으로 혼자 들어간다. 자꾸만 엄마의 욕창 사진이 눈에 아른거린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간병인 파견업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2시간이 지나서야 연락이 왔다. 이제부터는 ‘책임 떠넘기기’의 시간이다.


간호사의 말을 요약하면, 일주일 전부터 엄마의 욕창을 인지하고 드레싱을 했는데 보호자한테 알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야 죄송하단다. 그럼 대체 누구의 책임이냐고 했더니 조심스럽게 ‘간병인’이라고 한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한숨만 나왔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계시니 일단 주치의 면담 일정을 잡으란다. 언제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더니 확인하고 전화 준단다. 잠시 후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온다. 주치의가 엄마 상태 보고 갔다고, 지금 면담이 가능한데 올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환자를 둔 보호자에게 ‘아니오’라는 답은 없다.     


택시를 타고 다시 병원으로 향한다. 최악의 의사라고 생각했던 그 의사를  나 혼자 만나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   

분명한 건, 엄마를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문제제기’ 해야 한다.

마음을 굳게 먹고 병원문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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