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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랑 Sep 20. 2023

지금은 적응 중(2)_첫째주 후반

좌충우돌 정신과 입원기(4)

입원 5일차

내가 내 이야기를 하기 힘든 데에는 ‘망각’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고 있다. 다 기억이 안 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만 하면 남는 게 없다.

자해 충동이 심해서 얼음을 받아서 씹어 먹었다. 그랬더니 머리가 띵… 충동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머리가 좀 아프니까 다른 종류의 건전한(?) 자해가 되었다는 느낌??

전공의 선생님 면담에서 그러나 수기랑 몇 개 글을 보여드렸다.

밀물과 썰물이 있는 이유를 아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걸 안다고 밀물과 썰물을 멈추게 할 수 없으니까. 자살 충동도 마찬가지라고. 원인을 안다고 멈추게 할 수 없다. 그 강도를 줄이는 건 가능하겠지만.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거 그럴만하다고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감동…


입원 6일차

7시 반이 다 되어서  앞자리 간병인 분이 깨워서야 일어났다. 너무 피곤했다.

자해에 대해 생각하니까 더 충동이 심해지는 것 같다. 그치만 생각을 멈추기는 너무 힘들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보려고 공부를 했는데 하나도 집중이 안되고 아는 듯 모르는 듯 모르겠다.

엄마가 면회 와서 보조배터리와 스도쿠 책을 얻었다. 아 참 보조 배터리도 입원 생활 필수템이다. 특히 아이폰은 배터리가 하루종일 가지 않기 때문에 보조배터리 없으면 힘들다. 엄마가 공차도 사다 줘서 친구랑 같이 맛있게 먹었다.


그리곤 오후에 사고를 쳤다. 자세한 내용은 모방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생략. 입원한 지 6일 만에 사고를 치다니. 나도 참 무모했단(?) 생각이 든다. 결국 2시간 동안 집중 관찰 격리실에 있었다. 그게 원칙. 안에서 너무 심심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빈 방에 침대만 있고 거기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있자니 다양한 생각이 들었다. 주로는 내가 사고 친 걸 어떻게 전공의 선생님과 교수님께 설명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분명 어떤 기분에서 그랬는지 자세하게 물어보실 텐데 난 마땅한 대답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격리실에서 오후 10시쯤에 풀려 난 뒤 잠을 자려했는데 정말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끄적인 글.

나는 왜 힘든 걸까. 힘들어할 자격은 있는 걸까? 자해는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내가 너무 싫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 또 있을까. 여기 좋아지려고 온 거잖아. 근데 자해를 왜 하냐고. 아무리 나 자신을 이해해 보려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냥 바라는 건 단 한 가지. 내가 사라지면 좋겠다. 왜 죽으면 좋겠어? 도대체 왜? 죽는 게 그렇게 쉬워 보여?
자기 파괴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고 죽어 마땅하다는 등의 생각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난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는 사람인데.

나 자신에게 따지듯 쓴 글을 보니 마음 한켠이 아린다. 다들 날 이해해 주지 못하는데 왜 나라도 나를 보듬어 주지 못했을까 하고. 지금도 여전히 나를 아끼기보단 미워하는 쪽이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진 시점에서 그때의 나를 보니 안쓰럽다.


입원 7일차

엄마 생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 받자마자 생신 축하드린다고 문자 보냈다. 5월인가부터 엄마 생신 때 기가 막힌 걸 준비하려 했는데.. 내가 입원할 줄이야. 일요일이어서 예배를 드리다가 엄마 와서 면회하고 또 스도쿠를 풀려다가 집중이 안돼서 다시 일기를 썼다. 나 진짜 노답인 게 쉬운 스도쿠 하나도 자리 잡고 못 푼다.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하다.

또 힘들어져서 이번엔 얼음 대신 약을 먹었다. 너무 우울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밖에 있을 땐 ‘우울하다’는게 잘 안 느껴졌었는데 입원하고 나니까 너무 또렷하게 느껴진다. 이상하지.  간호사 쌤이 배려해 주셔서 저녁 약을 일찍 먹었다. 효과가 있는지는 글쎄… 그냥 이쯤되면 항우울제 자체에 내성이 생겨버린게 아닐까.


병동의 주말은 참 힘들구나를 느낀 첫 주말. 입원 생활이 끝날 때까지 전공의 선생님과 교수님 없는 주말을 보내는 건 참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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