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겪었던 음식과 관련된 작은 이야기들
평소 먹을 것을 좋아하는 나는 여행에서도 음식에 신경을 많이 쓴다. 다만, 미국 여행 당시에는 혼자 다니는 일정이 많은 데다 예산도 정해져 있다 보니 끼니마다 잘 챙겨 먹지는 못했고 가끔씩만 정찬을 즐겼다. 게다가 나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유별난 한식 맞춤 입맛이어서 타지 음식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양식을 아주 좋아했기 때문에 설마 미국 음식이 입맛에 잘 맞지 않을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장기여행을 떠나면서 새롭게 깨달은 점이었다. 그래서 여행기간에 비해, 그리고 맛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에 비해서는 음식을 잘 즐기지 못하고 왔다. 그래도 그 부족한 식사들 중에 작은 추억들을 만들어 준 순간들이 있었다.
경유를 위해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짧은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기내식을 줬다. 설레는 여행의 시작에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기내식을 받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국내 항공사라 그런지 간도 딱 입맛에 맞아서 맛있는 식사를 했다. 기내식에 메밀국수가 함께 나왔는데 나는 식당에서 작은 육수 그릇에 국수를 담가먹던 습관 그대로, 육수를 빈 그릇에 부어놓고 국수를 적셔먹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승무원분들이 차례로 커피를 따라주셨다. 주전자만 들고 계시길래 대체 다들 어디에 커피를 마시고 있나 보니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열심히 메밀국수를 담가먹던 육수 그릇을 들고 있었다. 왠지 국수 먹는 그릇이라기에는 너무 예쁘고 간편하게 손잡이가 달려 있긴 했었다. 그 그릇은 커피 컵이었고, 육수는 국수 그릇에 바로 부어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순서대로 커피를 따라주고 있던 승무원님은 내 컵에 이미 담긴 갈색 액체를 보고 조금 의아한 얼굴을 하셨고 나는 머쓱하게 설명한 다음 종이컵에 무사히 커피를 받았다. 조금 민망했지만 비행기 창 밖을 보며 마시는 커피는 참 맛있었다.
LA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아침에 직접 팬케이크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숙소를 알아볼 때 그 팬케이크에 대한 호평이 많아서 나도 크게 기대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직원이 팬케이크 반죽을 준비해놓으면 각자 취향대로 구워 먹는 식이었는데, 하루 종일 많이 걸어 다닐 예정이었던 나는 비장한 각오로 팬케이크 반죽을 양껏 팬에 부었다. 요즘은 집에서도 팬케이크 믹스를 사다 종종 구워 먹지만 그때는 딱히 팬케이크를 구워본 경험이 없던 데다가 스테인리스 팬도 처음 사용해보는 거라 조금 버벅거렸다. 결국 나는 팬케이크가 아닌 무슨 가죽 비슷한 걸 연성해냈고, 첫날 아침은 그렇게 과하게 폭신한 가죽빵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아침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는 다른 여행객들이 내가 팬케이크를 굽는 걸 슬쩍 와서 봤었는데, 결국 다들 식빵이나 시리얼을 선택해서 조금 의기소침해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맛은 되게 좋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머무는 동안 팬케이크 굽기 실력이 많이 늘어서 뒤로 갈수록 그럴듯한 팬케이크 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과일을 정말 좋아하고 특히나 체리를 정말 정말 좋아한다. 해외여행을 갈 때마다 그 지역에서 저렴한 가격에 유통되는 맛있는 과일을 사 먹는 게 큰 재미였는데 미국에서는 그게 체리였다. 사실 그렇다고 한국보다 엄청나게 저렴했던 것은 아니지만, 물가를 생각해볼 때 꽤 합리적인 가격이었고 무엇보다 아주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LA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 동안, 체리와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맛의 요거트를 여러 개 사놓고 저녁마다 디저트로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런데 LA를 떠나기 이틀 전, 누군가 내 체리를 훔쳐갔다. 공용 냉장고에 보관하긴 했지만 검은 봉지에 꼭꼭 싸서 이름과 호실까지 붙여놨는데, 통째로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 봉지를 열어서 한주먹 정도의 체리만 남기고 나머지를 훔쳐갔다. 같은 봉지에 넣어놨던 요거트는 그대로 있던 것 보면 목적이 꽤 뚜렷한 것 같았다. 여행을 하면서 뭔가를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적이 없었는데, 이때가 유일하게 도둑맞은 순간이었다. 그 전날 게스트하우스 여행객들이 모여서 파티를 한다고 했었던 걸로 보아 파티 중에 취한-술에 취하든 분위기에 취하든- 사람이 충동적으로 꺼내먹은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나에게 LA는 혼자 하는 미국 여행이 녹록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해 준 도시였는데 체리 도난 사건도 그 사례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