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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Jan 09. 2022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눈앞의 계단 한 칸 오르기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에 부딪히곤 한다. '참 세상 일 내 맘 같지가 않네.'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제는 꽤 오랜 과거가 되어버린 어린 시절에 나는 뭐든지 노력으로 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꿈은 이루어진다.' 라던지,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들을 당연한 진리처럼 배우고 익혔다. 지금도 물론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에 희망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고 발전하기 위해서 늘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은 맞지만, 그 말들이 나의 수용력과 체념하는 근육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어떤 일'이라는 건 천재지변 같은 것이었고, 그런 몇 가지 일을 제외하고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을 조금 더 살아보니 생각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부분에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았다. 가장 만연한 것으로는 인간관계가 그러했고, 만남과 헤어짐, 성공과 실패, 경쟁에서의 승패가 그랬다. 그 외에도 참 많은 것들이 내 힘으로는 손 쓸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아프기도 하고, 명백한 기준 없이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하며, 복권이나 경품에 당첨되거나 낙첨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나의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이 변하거나 사라져서 순식간에 나의 애정이 갈 곳을 잃기도 한다. 그건 나의 노력으로 되돌릴 수 없다.


패배주의에 물들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린 시절 배운 진리와 성장하면서 느낀 현실의 괴리를 좁히는 데 참 많은 고생이 있었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많은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는 말을 하고 싶다. 


처음 그 괴리를 느꼈을 쯤에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바로 자책감과 자괴감이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건 분명 내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일이었을 텐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건 내 노력이 부족했다는 걸까?" 늘 이렇게 나의 잘못으로 느꼈다. 심지어 대체 어떤 부분에서 노력이나 능력이 부족한 건지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더 막막하고 괴로웠다. 대단한 사람들, 부러운 사람들, 원하는 것들을 볼 때마다 내 자신이 맘에 안 들고 아쉬웠다. "왜 나는 이루지 못하고 갖지 못하지?" 어렸을 때는 경쟁에서 졌을 때의 자괴감이 너무 극심해서 아예 경쟁 자체를 피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괴리감을 극복하려는 과도기에는 사회에 화살을 돌려보기도 했다. "이건 뭔가 남이/사회가/세상이 잘못돼서 그런 거야!" 하지만 나와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 중에는 분명 내가 원했던 것을 이룬 사람들이 있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이 모두 같은 환경에서 성공해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대충 눈앞을 가리는 것은 나의 패배감과 욕심을 없앨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례들을 여럿 보면서 나는 그 성공들이 꽤나 무작위적이라는 걸 발견했다.


'운도 실력이다.' 역시나 과거의 나는 이 말이 너무나도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실력은 노력을 쌓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라고 믿었던 나에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까지 실력이라고 하다니. 하지만 그 말을 조금만 바꾸면 금방 납득할 수밖에 없는 문장이 완성됐다. '운도 결과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 수많은 어쩔 수 없는 일은 나의 노력이나 진심뿐만 아니라 운을 포함한 아주 다양한 요소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운과 타이밍이 필연적으로 닿아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주 사소한 일일지라도.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노력과 운은 하나만으로 뭔가를 완성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대충 80의 노력과 20의 운 또는 기회가 100을 이룬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80을 꽉 채워 노력하고 20을 기대하는 것뿐이다. 만약 제대로 된 20을 만나지 못해 100을 만들지 못했다면, 그 80은 분명 나중에 다른 80의 일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치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계획을 세우고 어느 정도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서 안정을 느끼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그 계획이나 통제가 무너질 때마다 불안을 느꼈고, 나의 통제에서 벗어난 '어쩔 수 없는 일'들은 늘 나에게 불안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일'을 내 계획과 상황의 일부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불안은 한결 줄어들었다. 내가 운전을 시작했을 때, 주행 기술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성격상 안전운전을 하는 편이었고 사고에 대한 약간의 강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최대한 완벽하게 주의하면서 운전을 했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갑자기 날카롭게 끼어드는 차가 있기도 하고, 빠른 속도로 위협 운전을 하는 차나 좁은 골목길에서 차 옆을 비집고 스쳐가는 오토바이도 있었다. 건널목이나 주차된 차 사이에서 튀어나오는 자전거나 킥보드는 몇 번이나 내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그래서 나는 운전하는 것에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내가 잘해도 언제든 사고는 날 수 있다는 생각에 피로감을 느꼈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해서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도로 상황은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나는 내 차를 안전하게 운전하는 것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에 맡기고 걱정을 비우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사고가 난다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벌어진 일을 해결하면 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냥 무엇도 탓하지 않고 보험처리를 하는 것이다.


걱정이 많던 나는 요즘 이렇게 생각을 소거하며 지낸다. 나를 곤란하게 하거나 속상하게 하는 일이 생긴다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게 아니라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속상한 감정만을 관리한다. 그 문제에서 벗어나서 흐르게 놔두고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정말 사람 앞일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계획을 세우더라도 그 계획에 절대성이라던가 깊은 애정을 두지는 않는다. 최선의 계획은 있을지라도 최고의 유일한 가장 좋은 계획은 없다. 내가 바라고 생각하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 세상 어떤 일은 마치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진행되기도 하고, 어떤 일은 모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세상과 삶의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기는 것이다. 


습관이 참 무섭다고, 이렇게 열심히 깨닫고 결심한 나의 생각도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앞으로의 날들이 너무나 걱정되고, 내가 세운 계획이 너무 불안하고 모든 게 막막한 순간이. 그럴 때면 나는 계단을 떠올린다. 당장 내 앞에 직면한, 바로 코앞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 앞의 계단 한 칸이다. 계단의 끝이 어딘지,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그다음 계단만 생각한다. 몇 계단을 올라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불안은 사라지고 결과가 남는다. 그게 고작 몇 계단일지라도 불안함에 휘청대다가 출발하지 못하거나 넘어지는 것보다는 분명한 결과일 것이다. 



오늘 나의 이 장황한 글이 바로 나의 계단 한 칸이었다. 두 달여만에 글을 쓰면서 그 시간이 고스란히 발전에 쓰였어야 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난 더욱 망설였다. 완성도 높고 의미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글을 접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세 달, 네 달이 되어도 마음만 무거워지고 다시 글을 쓰는 것은 더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계단 한 칸 만을 생각하며 올랐다. 하나의 글을 써서 올리는 것. 한 칸을 올랐으니 이제 다음 칸을 생각한다. 또 하나의 글을 올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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